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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성프리맨 Jul 16. 2024

삶을 되돌릴 수 있더라도 후회가 따르지 않을까?

그냥 써 보는 이야기 14

이번 생도 여기까지인가. 벌써 50번째 반복되는 끝나지 않는 삶의 쳇바퀴. 결국 이번에도 지키지 못했다. 내 눈앞에서 넝마가 된 채 죽어가는 백희의 모습을 또 보게 됐다.


"나.. 당신이 좋아. 차라리 내가 먼저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지금처럼.. 그래. 왜 진작부터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한 걸까?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간이 돼서야 어째서 난 알아차린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곁에 있어줘서 너무 행복해. 그리고 미안해. 이제 끝인가 봐. 안녕."


마지막 말을 끝으로 백희는 눈을 감았다.


크르르르르-


내 눈앞에는 50번째 백희를 죽음으로 이끈 불타오르는 모습의 거대한 늑대가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분노가 치밀었다. 도저히 나 혼자서는 어찌하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응당 복수라는 핑계하에 내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최소 10회 차까진 그랬다. 백희의 죽음은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녀를 위해 내 한목숨 버리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렇다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지.


늑대에게 죽임을 당하고 괴로움 속에 다시 눈을 뜨면 다시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지긋지긋하지만 계속 반복됐다. 이유도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인지하고 눈을 뜨면 결국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반지하 원룸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르르르르-


녀석의 인내심도 바닥을 치는지 한껏 온몸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불의 기운을 잔뜩 머금고 내게 앞발을 휘둘렀다.


쐐애애애액-


빠른 속도였지만 이제 이 정도는 피할 수 있다. 49번의 죽음이 마냥 헛되지 만은 않았던 게 이제 녀석의 공격 패턴 정도는 익힌 까닭이다.


크르르?


마치 '감히 내 공격을 피했어?'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한다. 하지만 공격은 거기서부터 계속 이어진다. 앞발 공격 2번 그리고 점프 후 내려찍기 마지막으로 방심하는 틈을 타 몸을 회전시켜서는 그대로 뒷발톱으로 내 몸을 반으로 갈라버린다.


'이번만큼은 달라야 한다. 이번만큼은 좀 더 나아져야 해. 백희한테 더 이상 부끄러운 남자가 되지 말자.'


처음이었다. 녀석의 모든 공격을 그동안 시뮬레이션해 온 것처럼 전부 피하다니.


'이게 되네?'


크르르르르-


녀석은 잔뜩 화가 났다. 보잘것없는 미물 같은 인간 주제에 감히 요물인 자신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이나 했을까? 모르긴 해도 자존심에 엄청 큰 상처를 얻었겠거니.


[아~~~~ 아~~ 아~]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49번의 삶동안 이런 적은 없었는데?'


요물 늑대도 흠칫하는 게 보였다. 소리의 주인을 알지 못하지만 분명 놈에게도 경각심이 동했으리라. 어디까지나 내 기대일 뿐이다.


쿠구구구궁-


심상치 않은 소리가 하늘을 뒤덮기 시작하더니 아까의 노랫소리와 뒤섞여 거대한 유성우가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 보는 광경. 보통은 늑대와의 사투(사투랄 것도 없이 일방적인 개죽음을 맞이하기 바빴지만) 중 되돌아가는 게 전부였다.


끼에에에에엑-


밤하늘을 붉은 비처럼 수놓은 수많은 유성우가 하늘을 장식할 즈음 늑대도 그제야 미친 듯이 포효하기 시작했다.


'미친.. 저게 뭐람.'


늑대도 모자라서 하늘에서 유성우까지 지구로 떨어지려 하다니. 이것이 종말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유성우는 가속도가 붙어선지 점점 다가오는 속도가 빨라졌고 멀리 점처럼 보이던 모습은 어느새 거대한 운석처럼 커져 있었다. 모르긴 해도 유성우 하나만 땅에 제대로 처박혀도 가히 핵폭발 수준의 영향력이 올 것은 자명한 일.


"하하..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죽음인가."


갑자기 모든 희망이 눈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사이지만 단 한 번도 고백하지 못했던 백희는 다시 또 죽을 것이며, 내 힘으로는 결코 요물 늑대의 몸에 흠집 하나도 내기 힘들 테지. 게다가 말도 안 되는 운이 작용해 늑대를 없앤다 해도 하늘을 뒤덮은 채 내려오는 유성우를 피할 길은 절대로 생기지 않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빨리 죽고 돌아가기라도 했으면 싶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쐐애애애액-


늑대의 공격 소리인지 유성우가 땅을 덮치러 내려오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50번째의 삶이 마감되려 하고 있었다.


'다시 돌아간다면 이번엔 꼭.. 백희에게 얘기하겠어. 모든 거 다 내려놓고 우리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자고.'


처음 하는 다짐은 아니지만 어째서 우리의 운명은 계속 엇갈리게 되는 걸까. 어쩌면 이 또한 지금의 기억이 온전히 계승되지 않기 때문일까?


장난이 너무 심하다. 그녀와의 관계에 대해선 아무리 돌아가도 기억이 떠오르질 않으니. 단지 수많은 사람이 죽고 세상이 망해가는 와중에 홀로 남아 죽음을 맞이하는 내 모습만 기억날 뿐이다. 그리고 죽기 전에서야 지금처럼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다.


'아.. 이번에도 실패했구나. 결국 그녀를 지키지 못했구나.'하고. 차라리 매 순간이 처음인 것처럼 리셋이라도 되면 좋을 텐데. 하필이면 죽기 전에서야.


콰콰쾅-


'죽음이구나. 어라.. 그런데 왜 아프지가 않지?'


이상한 마음에 질끈 감았던 눈을 조심스레 떠봤다. 지금까지 49번의 다양한 죽음을 맛봤는데 이 정도쯤이야.


"어..? 멀쩡하잖아? 말도 안 돼.."


손발이 움직여진다. 멀쩡하다고? 이런 적은 없었는데?


그리고 더 이상한 건 늑대가 거대한 운석에 짓눌려서 고속도로 위의 고양이 사체가 된 것처럼 쥐포처럼 짓이겨져 있었다.


"안녕.. 너 혼자니?"


정리되지 않은 상황 속에 멍해 있을 때 들려온 낯선 목소리. 헛소리를 들은 줄 알았다.


"혼자 살아남았어?"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도 모르게 시선을 옮겼다. 그곳엔 하얀 피부의 어린 소녀가 둥실둥실 공중에 떠 있었다.


"당신이.. 죽였나요?"

"응. 짖길래."

"뭐? 어떻게?"

"꽝! 하고 내리찍었더니 찍! 하고 죽었어. 그런데 혼자야?"

"아.. 어.. 그런 거 같아요."


멀리 죽어 있는 백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눈물이 핑 돌뻔한 걸 참았다.


"살아 남다니 대단하네. 이제부터는 나랑 다니자."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어요."

"앞으로 알아가면 되지."


50번째의 삶은 가장 절망적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희망을 엿볼 수 있던 삶이었다. 처음으로 괴물을 죽였으며 말도 안 되는 유성우도 피할 수 있었다. 물론 내 힘으로 이룬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포기하려 할 때 반전이 찾아오듯 50번째의 삶은 그렇게 남은 내 삶을 크게 바꿔준 터닝포인트였다.


[320번째 회차의 기록 - 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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