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히지 않는 기억의 특징

by 고성프리맨

'레스토랑에 취업해 요리를 못한다?'


그 말인즉슨 "너 잡부 당첨이야!"라는 말 되시겠다. 그렇게 난 삼촌이 오픈한 가게에서 잡부로서의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지금 잡부 무시하는 말 같은데 이거 실화냐?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해 주는 사람을 가리켜 잡부라 칭하는데, 일단 내가 했던 잡일부터 쭉 나열해 보겠다.


[오픈 전]

1. 은행 가서 돈 바꿔오기
2. 사이드메뉴 준비
3. 테이블 정리
4. 아침밥 든든히 챙겨 먹기
5. 자리에 앉아서 유튜브 시청하기


[오픈 후]

1. 주문받기 및 손님 응대
2. 서빙
3. 튀김 지원
4. 우동 지원
5. 삼촌 심기 건드리지 않기
6. 음악 선곡
7. 단골손님과 농담 따먹기
8. 팁 챙기기


[마무리]

1. 정리정돈
2. 일매출 계산 및 보고
3. 팁 나누기


[비정기적 업무]

1. 파트타이머 주급계산
2. 월매출 정리 및 세금계산
3. 가게 홍보
4. 음... 뭐 더 없나?


막상 써놓고 보니 '뭐 그렇게 엄청나게 많은 잡일을 한 것도 아니네.'

뭔가 쓰다 보면 더 있을 거 같지만 일단 크게 기억나는 건 이 정도였던 거 같다.

참고로 중간에 이상한 내용이 낀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기분 탓일걸요?"




기본적으로 특별한 때를 제외하곤 풀타임으로 근무했다. 나와 같이 호흡을 맞추는 파트타이머는 오전/오후 시간으로 나뉘어 각 1명씩 존재했다.


오전에 같이 호흡을 맞추던 직원은 인근 대학교 소속의 학생이었고, 오후에 같이 호흡을 맞추던 직원은 웨이트리스로서의 경력을 화려하게 쌓았던 누나였다.


굳이 내 포지션을 정하자면 Waiting Staff Manager였다고나 할까?

아무도 내 포지션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이가 없었으니 내 맘대로 CWO라고 직함하나 만들지 뭐. (Chief Waiter Officer??)


여하튼 부끄럽지만 알량하다면 알량한 권력을 소유했던(소유했다고 혼자만 믿고 있던) 당시의 나를 회고해 보도록 하는 시간을 가져보겠다.

.

.

.


기본적으로 영어에 큰 자신이 없었다. (지금은 더 심하다.) 그냥저냥 주워들은 말과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고객님께 팁을 잘 받아내겠다는 생각 정도만 하고 있던 상태였다.


오전에 일하던 웨이트리스는 일찍이 이민온 탓에 영어에 있어서만큼은 대단한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평소 영어 콤플렉스를 보유한 나로선 그런 그녀의 모습에 기가 살짝 눌려 있었는데, 그래서인가 가끔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보이더라도 크게 지적하지 못하고 내가 전부 나서서 해결하곤 했다.


반면 오후에 일하던 누나에겐 다소 가혹한 편이었다. 영어 실력도 왠지 내가 더 나은 거 같이 느껴지고, 자꾸만 누나가 쓰는 표현 중에 거슬리는 게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뭐 이런?!


발단의 시작은 이러했다.


"Order to ready?"


손님에게 주문을 받으러 갈 때마다 누나가 쓰는 표현이었는데 뭔가가 마음에 계속 걸리는 게 아닌가. 문법을 잘 모르는 나로서도 뭔가가 자꾸만 걸리는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혹시 식당에서 사용하는 관용적인 표현인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게 당시 서비스로 제공하는 음식에 대한 표현인 On the house 라거나, Toonie Tuesday와 같은 생소하면서도 알지 못하는 표현들을 들어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있어 보이려고 쓴 게 아님. Toonie Tuseday = 2 CAD로 즐기는 매주 화요일 벌어지던 할인 캠페인)


일단 누나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기에 앞서 검증의 시간이 필요했다. 확신이 섰을 때쯤 오전에 일하는 직원에게도 넌지시 물어봤다.


"이 표현이 맞아요? 틀려요?"

"엥? 누가 그렇게 씀? 당연히 틀리죠."

"오호라?"


검증완료.


오후가 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누나가 주문을 받으며 언제 말을 꺼낼지 매의 눈으로 지켜봤다.


"Order to ready?"


'드디어!'


잠시 후 주문 내역을 입력하러 오는 누나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누나."

"응?"

"Ready to order가 맞는 거 아니에요?"

"?"


뜬금없는 발언에 누나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아니 얘가 대체 뜬금없이 뭔 소리래?'라는 듯 놀란 눈은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내가 뭐라고 했길래?"


긴장되고 당혹스러워 보이는 누나의 입에서 굳은 느낌의 말이 나오고 있었다. 평소 여자의 마음에 대해선 일자무식인 화자는 당당히 이상한 기운(?) 따윈 감지하지 못한 채 신나서는 누나를 디스 하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 그렇게 표현을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손님들이 좋게 좋게 넘어가 준다 쳐도 우리는 제대로 된 표현을 사용해야죠오."

"......"


후련해졌다. 드디어 할 말을 했어.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구먼.

반대로 내 말이 누나에게 묵은 체증을 유발하리라는 생각은 못했던 걸까.


"아, 알겠어. Order- 아니. Ready to order? 가 맞다는 거지? 아, 입에 잘 안 붙네. 전에 있을 땐 다들 그렇게 했는데... 아니야 알았어!"




이후에도 자신감을 얻은 난 여러 번 누나에게서 실수가 나오면 지적질하기 바빴다.


"아니 아니 누나 이 표현이 더 맞는걸요. 이렇게 써야 해요."

"... 어."


그렇게 누나와 나 사이엔 점차 넘을 수 없는 차원의 벽 같은 것이 생겼다. 나와 같이 일하는 동안 누나의 표정은 내내 불편했다. 마지못해 어쩔 수없이 참고 일하는 모습에 가까웠다.


'더럽다 더러워. 사장 조카 놈한테 내가 이런 소리나 듣고 말이야.'


당시의 난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던 걸까?

내가 하는 발언 하나하나가 누나에게 굴욕감을 주리라는 걸 몰랐단 말인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사실 다 알고 있던 게 분명하다.

그저 난 불안정한 환경에서 비롯된 스트레스를 누나에게 풀었던 게 확실하다.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겠지만 지금에서라도 "진심으로 그때 미안했어 누나."라고 사과의 말을 하고 싶다.

.

.

.


-왜 그러고 살았습니까 휴먼?


"부끄럽네요. 부끄러워."


반성하며 아침을 열어 제낄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고해성사를 하게 됐다.


언제나 마음의 짐처럼 남아 있는 과업이 존재하는데 아직도 참 많이 남아있는 거 같다.

사람이 사람을 향해 모질게 대한다는 건, 결국 내게로 다시 돌아오는 법이구나.

결국 남는 건 후회의 감정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사자가 들을 리 없는 사과를 써야만 했다.

이 또한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성향에서 비롯된 이기심의 극치련만 어찌하겠나.

시간 일론 머스크인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의 길은 사과뿐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