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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게매니아 Jul 21. 2017

비극을 가린다는 것에 대하여

택시운전사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여러 면에서 비극적인 역사다. 군인이 민간인에게 발포를 하고 사격을 했다는 역사적 팩트는, 특정 집단에 의해 끊임없이 왜곡되고 부정되었다. 발포를 한 사람은 있지만 발포를 명령한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추모하고 기억하겠다며 만든 자리에는 정작 몇 년 동안 희생자 가족을 찾을 수 없었다. 확실한 역사적 사실을 두고 사람들은 두 쪽으로 갈라섰고, 그래서 5월의 광주는 한동안 서글픈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이 정도의 비극이 내포된 사건이라면, 필연적으로 그 사건이 가지는 힘 역시 생각보다 훨씬 강할 수 밖에 없다. 그 동안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뤄왔던 문화적 콘텐츠들이 취해왔던 방식은, 그 힘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처사다. 있는 그대로만 묘사해도, 실은 카메라만 조금 더 가까이 가져가도 1980년 5월의 광주는 보는 사람을 고통 속에 몸부림치게 만들었다. 우리와 똑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무참히 총에 맞고 쓰러진다. 그런데 그게 불과 37년전 이 땅에서 펼쳐진 일이다. 굳이 힘을 주지 않아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뤘던 영화들이 충분히 비극의 끝을 달릴 수 있었던 이유다.


<택시운전사>는 그런 면에서 꽤나 현명한 영화라 할 수 있다. 이야기는 서울의 택시운전사인 만섭이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흥얼거리며 한강을 달리는데서 시작한다. 살기 팍팍한 서울에서 동료 기사네 집에 얹혀 살던 만섭은, 10만원짜리 택시 손님이 있다는 말에 독일 기자 피터를 태우고 1980년 5월의 광주로 향한다. 신문에도, 방송에도 광주의 외침이 적히지 않던 시대.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광주로 들어간 만섭은, 그 곳에서 상상하지도 못했던 광경들을 목격하게 된다.


<택시운전사>가 현명한 이유는, 곧이곧대로 이야기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택시운전사>의 이야기는 철저히 만섭의 시각에서 펼쳐진다. 관객은 철저하게 만섭의 행선지에만 의해 재구성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만섭이 광주에 있을 때 관객은 광주의 참상을 직접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만섭이 광주에 없을 때, 관객은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적어도 화면으로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즉,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뤘던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택시운전사>의 관객은 1980년 5월의 광주에 대해 철저히 제한된 정보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런 연출의 효과는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참상에 대해 감독은 제한된 정보만을 관객에게 전달하지만, 관객은 영화를 보며 자연스럽게 제한된 정보를 머릿속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정보로 치환한다. 즉, 만섭이 광주에 없는 그 시간에도 광주에서는 이런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겠다는 것을 관객들은 기억의 재구성을 통해 완성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절제된 아픔과 객관적 비극이라는 그 동안 마주할 수 없었던 감정에 직면하게 된다. 슬픔의 전략적 절제는, <택시운전사>가 다른 5.18 소재 영화들에 비해 가지는 분명한 차별점이다.


피터의 카메라는 비슷한 맥락에서 또 다른 효과를 불러온다. 영화 중간중간, 피터는 카메라로 광주의 모습을 끈질기게 촬영한다. 그 과정에서 촬영된 피터의 영상은 스크린을 통해 관객에게 오롯이 전달된다. 이런 장면들을 통해 관객들은, 제3자의 시선으로 5월의 광주를 지켜볼 기회를 얻게 된다. 그리고 이내 관객들이 마주하는 것은 서늘한 고통이다. 굳이 직접 광주를 마주하지 않더라도, 제3자의 시각에서도 충분히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비극 그 자체라는 것을, 관객은 피터의 카메라를 통해 절절히 느낄 수 있다.


<택시운전사>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특징은 투박함 속의 절박함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투박한 모습을 놓지 않는다. 영화 후반부의 액션 역시, 매끈한 공산품이라기 보다는 투박한 수제품에 가깝다. 캐릭터들 역시 툭 치면 어디선가 튀어나올 것 같은 다양한 소시민들이다. 그러나 이런 투박함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절박함을 안겨준다. 주먹밥을 쥐어주고, 택시운전사가 고생한다며 기름을 가득 채워주는 투박한 사람들은,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는데 얻어맞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무장군인들 앞에 선다. 후반부의 액션 장면에서 보이는 투박한 사람들의 액션은, 그런 절박함에서 피어오르는 처절한 외침이다.


한 가지 더 주목할 부분은 만섭 그 자체다. 단발머리를 부르며 한강과 서울을 누비는 만섭에게, 현재 시절은 그야말로 호시절이다. 시위하는 대학생들을 끊임없이 욕하며, 광주로 가는 길을 막는 군인들에게는 진심을 담아 충성을 외친다. 평생 빨갱이가 아님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그가 5월의 광주를 통해 겪는 경험들을 통해, 영화는 드디어 보편성이라는 중요한 성질을 가지게 된다. 광주의 아픔이 특정한 집단에게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1980년 5월은 모두가 불행할 수 밖에 없었던 시절이라는 것. 만섭이 겪는 일과 함께 만섭과 교차되는 통제된 뉴스들을 통해, 관객은 잔인한 장면 없이도 아픔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진영 논리를 향해 영화를 만들고, 만족하는 진영에게 관람을 호소하는 영화가 있다. 애석하게도 그런 영화들 중 상당수는 완성도가 낮다. <택시운전사>는, 적어도 그런 측면은 완전히 벗어난 영화다. 한 발 떨어진 곳에서, 1980년 5월의 광주를 그 어떤 영화보다 보편적으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유머가 과하다던가 하는 눈에 살짝살짝 띄는 결함은 있지만, 크게 신경이 쓰일 부분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80년 5월의 절박함이, 결국 2016년 우리가 가졌던 희망과 연결된다는 것. 그 것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눈부신 영화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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