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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게매니아 Dec 27. 2022

행복하지 않다.

행복하지 않다. 오래전부터 마음으로, 몸으로 느껴온 문장이다. 몇 년 동안 지나쳐온, 모호하면서도 흐릿한 수많은 문장들 속에 명확해진 한 문장이다.


언젠가부터 세상이 회색으로 보이는 느낌이다. 한때는, 그러니까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희망같은 것이 있었을 때는 컬러감 가득한 세상이기도 했다. 지금은 아니다. 지나가면서 보이는 모든 풍경들이 회색빛이다. 마치 나의 시선에만 어떤 필터가 씌여져 있듯, 그렇게 세상은 어느 순간부터 회색빛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행복이란 것을 정의해보려 노력한 적이 있었다. 언제나 내려지는 결론은 여지없이 '쉽게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긴, 행복을 누가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을까. 0 아니면 1로 이루어지는 세상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 어쩌면 그런 세상에서는 행복을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사는 세상은 복잡하면서도 다원적인 세상이다. 당연히 그런 호사는 누려질 수 없다.


물론 행복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단편적인 느낌일 뿐이었고, 조각조각 흩어져 삶과 생각 속에 존재해왔다. 어떤 하나의 통일된 행복감은, 적어도 내 삶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행복을 찾으려하면 할수록 더더욱 알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어느샌가 가족은 귀찮거나 힘든 존재가 되어 있었고 주변에 의지할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 혼자 헤쳐 나가야 하는 세상이 되어 있었다.


슬픔은 나눌수록 줄어들고 행복은 나눌수록 커진다. 꽤나 유명한 문구이기도 하다. 저 문장의 허구성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슬픔도 행복도 나눌수록 줄어들거나 커지지 않는다. 마음의 무게가 누군가에 의해 컨트롤 될 수 있다는 허상을 표현하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스스로가 온전히 이겨내야 할 문제를 누군가에게 기대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보이기도 했다.


행복하지 않으니 삶이 예민해진다. 누군가는 나를 향해 섬세한 시선을 가졌다고 얘기한다. 포장된 가식에 불과하다. 섬세와 예민은 다르다. 나의 시선은 섬세보다는 예민에 가깝다. 늘 날이 서있고 부정적인 어휘로 가득하다. 한 때는 토론을 즐겨하기도 했다. 누군가를 향해 예민의 칼날을 들이민다는 것은 곧 상대방의 논리를 예리하게 파한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그러한 화법이 더 이상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있었다.


행복에 가득찬 사람을 보면 신기하다. 가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기도 한다. 그가 내뿜는 행복의 에너지가, 나를 조금씩 때려대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부터다.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을 곁에 두면 그 기운으로 자신 역시 행복해질 수 있다 얘기한다. 옳은 말인지 모르겠다. 행복감 가득한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 늘 힘들었다. 나와 다르다는 것에서, 그리고 나와 어울릴 수 없을 것이란 점에서. 그 힘듦 역시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내가 행복한줄 안다. 간극은 그 점에서 시작된다. 누군가를 향해 늘 웃는 삶을 몇 년 동안 이어왔다. 내가 행복하건 행복하지 않건 크게 상관없이 상대방은 나로 인해 불행해지면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나는 꽤나 행복을 누리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다. 그들에게 내가 누린다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묻고 싶지만 애써 참는다. 그냥 그렇구나, 그렇게 보이는구나. 하며 넘어간지가 몇 년이 되니 익숙해졌다.


1년 정도 정신과를 다녔다. 중증의 우울증과 신경 불안이 있었다. 누군가가 바라보던 나와 내가 바라보던 나 사이의 간극이 기어코 병을 불러온 느낌이었다. 1년 여에 걸친 심리 상담도 크게 의미가 없었다.(언젠가 이 치료들에 대해서도 한 번 얘기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상담은 일시적 완화일뿐 핵심적 부분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다행히도 정신과 치료는 이 간극을 조금씩 메워주고 있다.


행복하지 않다는 말을 쓴 이유도 여기에 있다. 행복하지 않다. 그러나 불행하지도 않다. 화학적 치료 덕분에, 행복도 불행도 사라진 세상에 사는 느낌이다. 세상을 다채로운 색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흑백의 세상을 보지도 않는다. 적당히 회색인 세상에 살기로 선택한 느낌이랄까. 무감에 가까운 삶을 살면서, 세계는 조금 더 차갑게 나를 끌어안는다. 그 차가운 세계가, 바로 내가 살아가야 할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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