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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게매니아 Dec 14. 2016

0과 1 사이의 관계

500일의 썸머

미친듯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다. 햇수로 2년 여 가까이를 좋아했으니 그리 가벼운 감정도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는 언제나 야속한 법이다. 그녀에게 나는 그저 한 명의 지인, 혹은 그 정도의 어떤 것에 불과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조금씩 만들어가던 사람과의 인연조차 박차고 그녀에게 찾아갔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왔던 나를 외면했고, 나는 지난 2년동안 그저 나 홀로 허우적거리기만 했다는 것을 기어코 확인하고야 말았다.


‘500일의 썸머’ 속썸머는 관객에게 있어 충분히 분노를 일으키게끔 만들만한 캐릭터다. 톰은 썸머를 사랑했고, 썸머는 그런 톰의 사랑을 적당히 ‘가지고 놀았다’. 가벼운 사랑이란 미명하에 톰은 썸머와의 관계를 끝까지 정의하지 못했으며, 온갖 노력에도 썸머는 기어코 톰을 떠나갔다. 그리고 다시 톰을 만난 썸머에게는 이미 누군가의 커플링이 끼워져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결혼식 애프터 파티에서 톰과 춤을 췄던 썸머는 누군가의 아내가 된다. 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 스토리란 말인가.


이토록 단순하게 이해되는 스토리는, 썸머를 ‘쓰레기 같은 캐릭터’의 대명사로 만들어버렸다. 사람 감정을 가지고 노는 일이 있을 수 없다며 지고지순한 사랑만을 추구하던 이들이 만들어냈던 처절한 캐릭터상인 셈이다. 당연했다. 썸머가 부정당한다는 것은 그들이 추구하던 순애보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다는 얘기와도 동일했다. 그러나 그 공식이 2016년 현재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답은 생각보다 심플하다. 불과 6년 전만해도 대부분에게 적용되었던 공식은, 이제 ‘젊은 층’이라는 타겟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순애보? 그들에게 순애보란 그저 순정만화 혹은 과거 한 시대를 지나왔던 멜로 드라마에나 겨우겨우 등장할만한 사전적 단어에나 불과하다. 이해가 안된다고? '순수한 사랑'의 반의어처럼 여겨졌던 이혼은 일상적 현상으로 변해버렸고, ‘썸’이란 미명 하에 모두가 썸머와 톰 같은 ‘인듯 아닌듯한’ 사랑을 필연적으로 거쳐가는 것이 현재의 트렌드다. 이런 상황에서, 순애보란 어디에 존재하고 있단 말인가.


‘이름없는 관계’란 단어가있다. 딴지일보 총수인 김어준이 설파한 내용이다. 인간 관계가 디지털이 아닌 이상, 0을 친구라 두고 1을 연인이라 둔다면 그 사이에 있는 관계를 ‘이름없는 관계’라 하자는 거다. 친구와 연인 사이.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데이트도 하지만 연인은 아닌 그 무언가가 있을 수 있다면, 그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인정할것인가. 라는 부분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었다. 저 개념이 처음 나왔던 2008년에야 충분히 파격적일 수 있는 컨셉이었다. 그런데 2016년 현재를 살아가는 사회에게도 이 컨셉이 파격적인 컨셉일까?


영화로 돌아간다. 썸머와 톰은, 그런 '이름 없는 관계'라는 단계 하에서 그들 나름의 행복을 추구했었다. 잠도 자고 밥도 먹고 영화도 보는데, 연인은 아니다. 썸머는 둘의 사이에서 관계를 규정하고 싶지 않았고, 톰은 그런 관계를 애써 규정하려 했다. 현대의 연애와 근대의 연애간의 숭고한 충돌이, 그들 둘 사이에서 발생한 셈이다. 물론 그 충돌이 온전한 충돌로 남았는가. 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이 있다. 어쨌든 그들은 끝까지 관계를 규정하지 않았고, 그 관계 밖에서 서로는 상당한 시간을 행복해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들어가본다. 썸머는 정말로 톰과의 관계를 규정하고 싶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는 썸머와의 관계를 규정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둘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다는 말은 서로가 서로에 대한 확신을 인지한다는 말과 동일하다. 영화는 철저히 톰의 시각에서 둘 사이의 이름 없는 관계를 조망한다. 그럼에도, 톰은 썸머에 대한 어떠한 확신도 가지고 있지 못한다. 만일 500일의 초반부에서 톰이 조금 더 썸머에게 확신을 보였다면 어땠을까. 아마 이 영화는 애초부터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누군가는 항변할 수도 있다. 애초부터 썸머는 그런 인간이라고.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소중히 하지 않는, 그런 가벼운 관계만을 즐기는 인간이었다고 말이다. 그래서 썸머는 나쁜 캐릭터이며, 연애라는 관점에 있어서 그녀는 도저히 상종 못할 인간이라고도 얘기할 것이다. 생각해보자. 어찌됐든 썸머는 누군가를 만나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게 된다. 톰과의 시간에 비해 그와 보냈던 시간이 비교할 수 없이 짧았음에도 결혼을 결정한 것이다. 과정을 회상하며 썸머는 본인도 그럴 줄 몰랐다고 톰에게 고백한다. 당연하다.


사랑은 운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톰은 사랑은 운명적으로 찾아올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운명론적 사랑은 곧 피동적 사랑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그녀와 나 사이의 운명이 이렇기 때문에, 어찌됐든 연결될 것이란 믿음을 가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톰은 썸머가 운명적인 사랑이라 믿었고, 그 운명이란 것은 어찌됐든 운명으로 이어질 것을 알았기에 그녀에게 더 이상 어떠한 운명보다 강한 믿음을 심어주지 못했다. 아니, 심어주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옳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톰은 운명을 믿었고, 운명은 어디에도 없었으며, 톰은 그 것을 기어코 깨닫고야 만다.


처음 얘기로 돌아간다. 돌이켜보면 나도 톰과 비슷했다. 홀로 몸부림쳤던 2년 여의 시간동안 나는 그녀에게 어떠한 믿음도, 확신도 주지 못했다. 그저 이 사람과의 인연이 운명이 될 수 있을거란 가련한 믿음 하나로 심연을 헤엄쳐야만 했다. 가슴 아픈 운명? 그런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서툴렀고, 결국 모든 것을 스스로 끝장내고야 말았다.


결국 결론은 하나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네 연애는, 결국 0과 1 사이의 0.64를 향하고야 만다. 만일 그0.64라는 관계에 확신을 가질 수 없다면, 당신은 0.64를 1로 만들기 위한 어떠한 발악을 해내야만 한다. 물론 그 발악은 때때로 비참할 정도로 서글픈 아픔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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