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여자
오래전일이다. 20대 시절, 어느 조용한 선술집에 남자 네 명이 모여 앉았다. 주제가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안 날 만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서로의 이상형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내 쪽에 이상형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원피스가 우아 - 에이 그건 너무 쉽잖아.라고 말할 순 있겠지만 나름의 까다로운 기준이 있다 - 하게 잘 어울리는 여자다.
돌이켜보니 다른 친구들의 이상형은 그다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긴머리를 장착한 그래서 섹시하다거나. 청순하다거나 그런 타입을 말했을지도. 그러나 유독 한 친구 녀석의 확고한 취향이 떠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묵묵히 타인의 이상형을 듣고만 있던 한 친구 녀석은 비우던 소주잔을 탁자에 살짝 떨어뜨리고선 묘한 웃음과 함께 팔짱을 끼더니 눈썹에 힘을 잔뜩 준 채로 말했다.
“나는 책 읽는 여자. 좀 더 정확하게는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책 읽는 여자”
선술집은 순간 정적했다. 우리의 입술은 아. 와 오. 를 번갈아 가며 말하고 있았다. 그러나 사실상 그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옆 테이블의 수다가 들려왔다. 친구와 난 인정의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무언가 지적이고 섹시한 느낌이 든다는 게 녀석의 이유였던 것 같다.
나는 라이카 모로크롬을 든 채로 런던의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언더그라운드는 여전히 공사 중이었고, 날씨는 오락가락했다. 특별할 거 하나도 없는 9월의 어느 초가을이었다. 나는 바비칸센터를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야 했다. 웨스트민스터 언더그라운드를 내려가던 중, 플랫폼에 서 있는 한 명의 여자에게 시선이 빼앗겼다. 다림질이 잘 되어 보이는 코튼 소재의 녹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한 손으로 책을 접어들고 그녀의 코 앞까지 책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여자는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어디선가 내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책 읽는 여자..."
그렇다.
내 친구 녀석의 이상형 - 덧붙이자면 내 이상형인 원피스가 어울리는 여자이기도 했다 - 이 거기에 서있었다.
작년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이틀 정도 뒤에 친구를 만났다. 그곳을 기억하는 건 오브제 덕분이다. 여전히 거리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비롯해, 알록달록한 느낌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친구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아쉽게도 녀석과 여자 친구의 첫 만남이 책 읽고 있는 지하철은 아니었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이미 세상에서 가장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친구의 모습은 몽상가를 꿈꾸던 20대의 그날 밤. 그 얼굴이었다.
낯선 도시를 갈 때, 언젠가부터 이상하게도 책을 챙기는 습관 - 그러나 어떤 여행에선 비행기를 제외하곤, 심지어 책을 펼쳐보지 않을 때도 있다. 라면 받침대로 쓰려는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방을 꾸릴땐 꼭 책을 가져간다 - 이 생겼다. 아마도 책이라는 것을 내 쪽에서는 일종의 여행자의 부적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UK | London | 2016 | ©Hyunwo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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