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당근마켓에 들어가 알바 지원을 했습니다.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설거지, 용달, 서빙처럼 직장과 병행해야 하는 것들은 거르고 화면을 쭉쭉 내렸습니다. "작품 관련 간단 인터뷰"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시급도 14,000원으로 괜찮았습니다. 지원을 한 뒤, 얼마 안 있어 채팅이 왔습니다.
그는 동물의 숲이라는 주제로 일러스트를 그린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세계관이 필요해서 인터뷰를 한다고요. 선뜻 제가 있는 곳까지 오겠다고 하여, 퇴근 후 자주 가는 카페에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모래내 카페는 아늑하고 조용한 공간이라 우리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습니다.
"아몬드라는 책을 읽어보면 한 소년이 나와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이죠. 일어나지 않을 일이긴 하지만, 안개님은 감정이 있는 세상이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감정이 없는 세상이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질문을 받자,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몸이 기억하고 뇌가 기억하는 사건들. 한 두개가 아니었던 사건들. 요즈음 어딜 가나 사랑받고 인정받던 저는, 질문을 받음으로써 4년 전 그 날의 움츠러든 모습이 되었습니다. 모래내 카페의 아늑한 의자는 움츠러든 저에게 꽤 크게 느껴졌습니다.
"감정이... 모두 사라진 세상이 좋다고 생각해요. 인간은 극한의 좋은 마음도 느끼지만, 대부분의 중요한 것들을 감정으로 그르치게 되니까요. 또, 좋은 감정 안 좋은 감정으로 받는 영향이 더 큰 것 같아요."
그 분-고용주-은 이유를 물어보셨습니다. 한 시간이라는 정해진 시간 안에 빠르게 이야기를 털어야 했기에, 저는 사소하거나 중복된 일들은 빼고 핵심만 간단히 이야기했습니다. 그 분은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마, 이야기라기보다 적확히 말하자면 '마음'을 나누고 싶었을 겁니다.
때는 2019년, 코가 빨개질 정도로 추웠던 겨울이었습니다. 그 날도 상사(저는 이 여자를 미친년이라고 불렀습니다.)에게 된통 깨지고 죽상이 된 저는 퇴근 준비를 했습니다. 저녁에는 약속이 하나 있었습니다. 미친년으로부터 저를 구제해주고 싶어하던 동료 언니와의 약속이었습니다. 이 언니를 이제부터 마녀라고 부르겠습니다.
마녀는 정말 예뻤습니다. 저는 무쌍에다가 눈이 커서 단아하고 수수한 외모였다면, 마녀는 짙은 쌍꺼풀에 뾰족한 턱, 긴 머리카락까지 어두운 조명 아래 그렇게 예뻐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입을 헤 벌리고 마녀를 바라보다가 민망해진 적도 있을 정도였어요.
마녀는 친한 오빠를 소개시켜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저는 정중하게 거절을 했고, 마녀는 그럼 소개팅 대신 세 명이서 같이 편하게 놀자고 했습니다. 이 제안을 거절하면 저는 마녀와 멀어지게 될 것 같, 아니 저는 마녀와 친해지고 싶었습니다. 그런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어느 번화가의 술집에 들어갔습니다. 다소 정갈한 분위기에 수비드 삼겹살과 소주를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등장한 그 남자는 큰 키에 웃는 얼굴, 다정한 말투로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리고선 민망한지 마녀와 이야기를 주고 받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남자-B-를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이때까지 살면서 보지 못한 사람.
궁금하다. 어릴 적부터 호기심이 많았던 저는 모든 것이 궁금했습니다. 그렇다고 재미없는 옛 고대 철학자의 철학이 궁금하진 않습니다. 내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 사람들의 심리, 반응, 마음 속 솔직한 생각, 이런 것들이요.
B는 마녀와 웃고 떠들며 장난을 쳤습니다. 저는 주로 대화에 끼지 못해 맴돌았고, 으레 그렇듯 마녀가 화장실에 간 사이 B와 장난의 물꼬를 틀 수 있었습니다. B는 "꿈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멋있어보이던지요. 그렇게 그 남자와 연애가 시작됐습니다.
그 후 4개월간 B와 불타는 사랑을 했습니다. 20대 중반, 그 시기였기에 할 수 있었던 불타오르는 사랑이었습니다. 밀양에 가면 벚꽃나무가 늘어선 도로가 있습니다. 봄이 왔고, 저는 B아버지의 트럭에 타고 "오빠, 달려"를 외치며 벚꽃나무에서 떨어져 내리는 꽃잎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조직 생활을 힘들어했던 저는 퇴근을 하면 커다란 네 개의 횡단보도, 저 쪽에 서 있는 B를 보고 발에 시동을 걸었습니다. 빨갛게 빛나던 신호등이 딱, 하고 초록색으로 바뀝니다. 시동을 걸었던 발가락 끝에 힘을 주고 땅을 밀어, 전속력으로 그에게 달려갔습니다. 목표 지점에 다가왔음에도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고 그대로 달려가, 그의 팔에 안겼습니다. 그러면 그는 저를 번쩍 들어 온 세상을 다 가진 여자처럼 빙글빙글 돌려주었죠. 한껏 기분이 좋아진 저는 그의 머리칼을 다 쥐어뜯었습니다.
신성하게 만남의 의식을 갖춘 뒤에는 함께 술을 마시러 출동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자주 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너를, 다섯 살이 많은 내가 망치는 것 같은 기분이 종종 든다. 너의 아버지께서 너를 귀하게 키우신 게 느껴진다."
그러면 저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애가 아니라고, 누구에게도 속박된 존재가 아닌 '고유한' 존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끝끝내 제 순수함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는 저와 달리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랐고, 세상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저는 그런 그가 좋았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한 여자가, 직장을 다니며 직장에서도, 가족들에게도, 교회나 친구들 외 본인이 속해 있던 모든 소속에서 괴로움을 느낀다면 어떤 심정일까요? 아마도 사회 생활을 잘 해나갈 수 있도록 돕고, 지지하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저는 꽤 자주 술을 마셨고 길거리를 방황했습니다. B는 저를 다독여서 출근을 시키는 게 하루의 첫 시작이었고, 달래서 집에 들여보내는 게 하루의 끝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B와 크게 다투게 되었습니다. 집에도 가기 싫고, B와 있기도 힘들고, 갈 곳 없던 저는 마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언니, 어디에요?" "나? 친구랑 한 잔 하고 집이지. 왜?" "저 가도 돼요? 재워주세요.." "그래, 데리러 갈게." 언니는 핫도그를 전자렌지에 돌려서 빨갛고 채도 낮은 케찹을 쭉 짜주었습니다.
"왜? 무슨 일 있어?" "저 B랑 싸웠어요." "진짜? 왜?" "아니 그게..." "가만 있어봐. 한 번 전화해보자."
따르릉.
"여보세요."
저는 이 공간, 이 공기 속에 없는 사람처럼 숨도 쉬지 않았습니다.
"오빠, 뭐해? 지금 안개 우리 집 온대. 무슨 일 있었어?"
"하..몰라 씨발.."
"왜 그라노~ 좀 잘 안 맞나? 좋다면서?"
"그런 게 있다.. 술 졸라 많이 마셨다.."
그리고 들려오는 킥킥 소리.
"옆에 누구야?"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와 마녀는 본능적으로 알았습니다. XX염색체를 지닌 성별이, B와 1m이내의 거리에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는 걸요. 그 공기가 핸드폰 전파를 타고 이쪽 공기까지 전해져왔습니다. '그년들'은 제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더 숨을 헙, 하고 참았습니다. 마녀는 크고 뾰족한 눈이 더 뾰족해졌습니다.
"옆에 그년들 닥치라 해라. 뭐하는데 오빠, 안개 옆에서 듣고 있다. 일단 내일 다시 통화하자."
다음 날, B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