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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비 Mar 27. 2018

엿같은 이별을 맞이한 당신에게

“I wish I had a bulletproof soul.” 

먼저 위로를 보낸다. 이별한 지 얼마 안 됐거나, 누군가에게 상처받아 지속적으로 마음이 아픈 상태에 놓인 당신. 밥은 잘 먹고 있나? 잘 지내고 있나? 


나는 엿 같은 기분의 당신에게 이 노래를 들어볼 것을 권한다. 이이언 1집 <Guilt-Free>에 실린 ‘Bullet Proof’라는 곡이다. 약을 들이부은 듯한 몽롱한 분위기와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멜로디, 거기에 전자음 리듬이 모닥불처럼 타닥거리며 귀 끝을 건드린다. 우울감을 더 우울하게 만들어서 활활 태우고, 바닥까지 치고 올라오기에 좋다. 사실 여기서 더 나빠질 것도 없잖아? 


음악적 매력을 떠나 이 곡을 가슴 아픈 사람들에게 권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가사가 그들의 바람을 너무나 정확하게 담고 있기 때문이다.


“I wish I had a bulletproof soul.” (내 영혼이 방탄이었으면)


누구에게도 침해받거나 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을 이 곡은 ‘방탄’이라는 단어로 노래한다. 


이별은 뭘로 포장해도 X같은 일이다. 어느 노래 제목처럼 ‘총 맞은 것처럼’ 아프고 싶지 않으려면 미리 심장을 방탄으로 만들면 된다. 좌절에 빠지지 않는 비결은 오직 매사에 담담해지는 것뿐이니까. 다만 방탄 심장이란 건 보통 사람의 육신에는 깃들지 않으니 문제다. 게다가 한두 번 방탄에 성공했더라도 같은 곳을 여러 번 집중적으로 두들겨 맞으면 장사 없다. 권총탄은 막아도 소총탄은 못 막는 방탄막이 있듯, 어떤 사람 앞에선 작동하던 방탄막이 다른 이에게도 먹힐지는 미지수다. 실제 방탄조끼는 최소 6발을 막고 방탄 성능이 최소 6년은 유지되어야 방탄 기준을 충족한다고 본다. 인간의 방어 심리 기제가 아무리 튼튼한 철벽 방탄막을 만든다 해도 방탄조끼처럼 수명이 6년이나 될까?


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바람과 달리 이별은 당신 나름 겹겹이 쳐온 방어막을 찢고 심장을 헤집는다. 원치 않은 이별은 자존감을 바닥으로 떨어트린다. 나도 그랬다. 긴 시간 서로 같은 마음으로 사랑했다고 믿었던 사람이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오 씨발, 그때의 충격과 절망, 혼란과 분노를 운동에너지로 바꾼다면 아마 태백산맥을 통째로 뽑아 몽골 초원으로 던질 수도 있었을 거다. 


영원할 줄 알았던 관계가 끝났지만 멍청하게도 우리가 어떻게든 변할 수 있고,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며 상대를 설득하려 했다. 실패했다. 버티려다가 처참해지겠다 싶어 미안해하는 그 앞에서 병신처럼 굴지 않기로 다짐했다. 관계는 끝이 났지만 내 안의 분노와 무기력감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샤워하다가 울고, 양치질하다가 울고. 한번은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다가 갑자기 통곡하는 바람에 미용사가 당황한 일도 있었다. 쪽팔린 것도 모르고 공공장소에서 우는 불쌍한 미친 여자가 된 기분이 이런 거구나. 이 정도로 울면 몸이 육포처럼 비틀리진 않을까 걱정됐다. 화가 나거나 슬퍼서 잠도 오지 않았다. 반면, 직장에서는 여전히 일에 충실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성과도 좋았다. 빌어먹을, 그 덕에 쉴 틈이 없었다. 친구들 앞에선 “이참에 새 남자를 만나보겠다”며 허세를 부렸다. 여행을 하고 돈을 쓰고, 낯선 곳에서 낯선 남자의 추파를 받으며 순간의 우쭐함을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들이키는 공기마저 아픈 이별통은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이제 괜찮아졌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갑자기 욱신거릴 때가 있다. 그의 소식을 들을 때, 다른 사람과 함께인 모습을 볼 때, 다른 누군가에게서 헤어진 그의 흔적을 찾는 자신을 볼 때, 물 마시다가 길을 걷다가 밥 먹다가 그냥 문득. 복싱 챔피언이 6차, 7차, 8차 방어전을 이어가듯 들이치는 이별 후속타를 모두 막아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이별은 그냥 아픈 거다. 면역이 생기지도 아니다. 이별은 매번 다른 질감과 양감으로 아프다. 어떨 땐 사포처럼, 어떨 땐 송곳이나 면도칼처럼, 어떨 땐 대포알이나 대륙간 탄도 미사일처럼. 


얼마 전, 지인 한 명이 아주 오래 사귄 여자와 헤어졌다. 그는 이별의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전화 붙잡고 몇 시간을 울었어요.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이야기고 속으로 몇 번을 상상했는데 머릿속에 그린 그림보다 훨씬 슬펐어요. 우리가 헤어지는 이유를 이렇게 얘기했어요. ‘사랑이 다 닳아 없어졌기 때문’이라고요. 서로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어요. 내가 미안하다고 하면 그녀가 ‘더 미안했다’고 하면서 울었어요. 그 말을 들은 나도 울고. 너무 많이 울면 명치가 욱신거리고 머리가 아프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오래 사귄 연인의 이별은 헤어진 후보다, 헤어지기까지의 과정이 더 슬프다. 둘은 아마 상당한 시간을, 점점 앙상해지는 감정을 붙들고 서로를 외롭게 하다가 헤어졌을 것이다. 관계가 지속되려면 둘 사이는 변해야 한다. 연애 초기 뜨거운 사랑보다 질기고 튼튼한 다른 감정으로 둘러 애정이 모두 소진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초반부의 감정이 불이 확 잘 붙는 얇고 부드러운 미용티슈라면, 후반기의 사랑은 그보다 질긴 키친타월 같다. 서로의 흠을 이해하고 미래를 함께 계획하면서 서로를 지켜주는 단계. 그게 발전하면 계속 빨아서 다시 쓸 수 있는 재활용 가능 키친타월이나 행주로 진화하겠지(그걸 보통은 결혼이라고 하더라). 사랑이 질기고 단단하여 둘의 수명보다 길면 그걸 멋진 말로 ‘백년해로’라고 부른다. 그러나 결국 죽음이 이별을 가져온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클리셰를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다. 이별은 언젠가 온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마음을 감싸는 완벽한 방탄조끼 같은 건 없다. 


이별을 겪은 당신은 지금 피떡이 되도록 얻어맞고 다리가 풀려 비틀비틀 자꾸 주저앉는 그로기 상태의 복서처럼 무기력하다. 다음 라운드, 다음 경기가 있으니 잘 버텨보라, 그런 말 차마 못 하겠다. 이별을 현명하게 극복하는 비결이 딱히 있는지도 의문이다. 시간의 힘이나 다음에 올 사랑을 믿어보라고? 밥술만 떠도 눈물이 줄줄 흐르는 당신에게 무슨 말이 위로가 되겠나. 


그래서 난 이별을 어떻게 극복했느냐고? 그냥 살았다. 영원할 것 같은 사랑도 끝나는데 고통이라고 영원하겠나? 돌아보니 그와의 관계 외에도 내 인생은 꽤 괜찮았다. 주변엔 나를 지켜주는 친구와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다. 나는 내 일을 여전히 좋아했다. 방탄 심장을 찾아 헤맸으나 없었다. 현실 도피도 그때뿐이다. 대신 어떤 것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도록 인생을 풍부하고 견고하게 만드는 쪽을 택했다. 


당신 세계도 총알이나 대포 정도로 무너지지 않을 거다. 몇 차례의 분쟁이나 전투, 전쟁을 견딜 자신감이 생기면 다른 이의 세계를 경계하기보다는 호기심을 갖고 포용하게 된다. 그렇게 다시 사랑에 빠질 용기는 그렇게 충전된다. 전화통 붙들고 울고불던 그 지인은 어떻게 됐냐고? 바로 다른 여자 만나서 연애만 잘 하더라.

 

눈물 때문에 밥이 좀 짜도 이왕 뜬 밥술은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넘겨라. 이미 일어난 일이다. 사랑이고 이별이고 나발이고, 그런 게 ‘당신’보다 중요한가? 


처칠이 말했다더라. “만약 지금 지옥을 걷고 있다면 멈추지 말고 가라(If you are going through hell, keep going).” 


이별의 아픔도 끝이 난다. 당신 인생에 엿 같은 일이 생길 때마다 저 대머리 영감 말을 떠올려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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