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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비 Mar 27. 2018

혼자 살기

혼자 살기에 누군가 태클 걸어올 때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왜 혼자 살아요?”라고 묻는 사람이 줄었다. 결혼 여부를 묻는 질문 앞에는 “실례지만”이 붙는다. 실례라니... “혹시 사람 고기 먹어봤나요?”라고 물어볼 것처럼 조심스럽게 말이다. 초면에 불쑥 바깥분은 뭐 하느냐, 애는 있느냐고 묻는 게 전혀 실례가 아니었던 예전에 비하면 큰 변화다. 


주변 20~40대 친구들 상당수가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산다. 혼자살이 18년차인 나도 그 중 하나다. 엄밀히 따지자면 혼자 살진 않는다. 귀여운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산다. 고양이 입장에선 세입자인 내가 들락날락 하면서 똥을 치우고 밥을 바치는 형태겠다. 아무튼 나는 밤늦게 일 마치고 돌아와 맥주를 마시면서 혼자 레고를 조립하고, 고양이들과 얼굴을 부비다 입에 붙은 털을 퉤퉤 뱉으며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하다. 


지금의 나처럼 결혼하지 않고 사는 게 그리 이상하지 않은 세상, 결혼 제도에 헌신할 것인가가 ‘개인의 선택’인 시대다. 다만 모든 게 일괄 바뀌진 않았다. 세상의 변화는 개인의 인생 사이클에 따라 순차적으로 온다. 내 부모님만 해도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 이전 세대는 가정을 꾸리고 애 키우는 것이 일생의 업인 시대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지금도 가끔 내 성생활, 정확히는 자궁 상태에 관심을 갖는 어르신들을 마주친다. 작년인가? 갓 왁싱을 하고 목욕탕에 갔는데 한 할머니가 나의 민둥한 아랫도리를 물끄러미 보더니 “출산한 지 얼마 안 됐나봐?”라고 물었다. 출산 전에 산부인과에서 아래를 제모해준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나는 홀랑 벗고 마주본 채로, 여든은 족히 넘어 보이는 그분께 왁싱을 왜 했는지 설명할 재주가 없었다. 그냥 웃으며 말했다. “아이구, 힘드네요. 하하.” 내 넉살에 스스로 탄복했다. 


요새는 명절이 되면 ‘애들한테 불필요한 질문 세례 퍼붓지 마라’는 논조의 칼럼이 보인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 심한 애들에게 결혼, 취직 여부, 자녀계획 등을 꼬치꼬치 캐물어 스트레스 더 주지 말라는 것이다. 새 시대에 점잖게 적응하자는 것이 글의 목적이겠지만, 나는 반대로 ‘애’들에게도 조언하고 싶다. 불필요한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사람이 자기와 다른 삶에 대해 본능적인 호기심이나 거부감이 드는 게 당연하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나에게 갖는, 결혼이 당연한 사람들의 자연스런 물음표인 거다. 대부분의 어른들도 딱히 할 말은 없는데 본인이 윗어른이라는 책임감에 그냥 참견하는 거고. 아니, 진짜 걱정되면 그 자리에서 결혼자금으로 내 주머니에 한 5천 빡 꽂아주시겠지(그럼 일단 그냥 받자, 우리 받고 생각하자). 그러니 혼자 스트레스 받고 ‘내가 잘못 살고 있나’ 고민하거나, 반대로 발끈하지 말자. 그냥 씹어라, 이왕이면 슬기롭게. 나도 사회적 혼기가 찬 이후에는 “결혼은 대체 언제 할 거냐”는 질문을 무지하게 받았다. 그럴 때마다 *“그러게요, 하하”라는 대답을 자동 매크로 돌리면 그만이다. 그 친척 어른께서 내 멱살을 잡아 식장에 끌고 가시는 게 아니라면, 저항할 거리도 안 되는 미미한 순간이니까. 


* 참고로 “그러게요, 하하” 무한반복 매크로 대화법은 어른들이 하는 모든 걱정 어린 질문에 대응하는데 상당히 쓸모 있다. 취직은 언제 하니? “그러게요, 하하” 애는 언제 가질래? “그러게요, 하하.” 언제 철들래? “그러게요, 하하.” 만사형통.


혼자 사는 당신과 나. 우리는 결혼이 당연한 시대에 산 어른들과, 그 시대의 가치관을 따르는 이들과 동시대를 같이 산다. 당분간은 이렇게 수십 년을 더 살 거고, 이들의 생각 또는 당신의 생각이 언젠가는 바뀔 수도 있으며, 먼 훗날 당신 역시 ‘요즘 애들의 인생관’에 혀를 끌끌 찰 꼰대가 될 거다(내 장담한다). 혼자 잘 살기 위해서는 나와 다른 가치관의 사람과도 같이 잘 살아야 한다. 앞 세대와도, 뒷 세대와도 유연하게 말이다. 중요한 건 그 사이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진짜 행복한가’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고민하는 당신 자신이다. 그러니 누군가 지금 당신의 ‘행복한 혼자 살기’에 태클을 걸어오면 열 받거나 흔들리지 말고 씩 웃어라. 


“그러게요, 하하.”


(본 글은 2018년 2월 구정 연휴를 앞두고 제 자신의 정신적인 무장을 위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친척 어른들의 질문 폭격에 멘탈이 가루처럼 분쇄된 연휴 직후엔 이같은 글을 다시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미리 여기에 적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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