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게 세상에 있나 싶기도 하고 말야.
“콧구멍으로 다리가 나온다고 생각하면 돼.”
예전에 출산 후 회사로 복귀한 여자 선배에게 애 낳는 게 어떤 기분이냐고 물으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영화 <토탈리콜>에서 주인공 퀘이드(아놀드 슈월제네거 분)가 자기 머릿속에 박힌 골프공만한 추적 장치를 콧구멍으로 빼는 장면과, <에일리언>에서 인간 뱃속에서 까놓은 에일리언 알이 부화하여 괴물새끼가 몸 밖으로 튀어나오는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선배에게 “무경험자의 빈약한 상상력은 거기까지”라고 털어놓았다. 선배는 “무슨 상상을 하든 그 고통에 곱하기 100을 하라”고 조언했다.
중국 산둥성의 어느 산부인과 병원에서 임신 중인 배우자의 고통을 남편에게 간접 체험하게 했다. 분만모의실험장치로 복부 근육에 전기 자극을 주어 분만 시 고통을 체험하게 하는 이벤트였다. 대부분의 남편들은 진통 몇 분 만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뉴스를 보니 콧구멍으로 다리가 나오는 것 같았다던 선배 말이 과장은 아닌 듯하다. 실제 출산의 진통은 몇 시간 이상 지속되며 고통은 단지 복부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몇 해 전에 엄마가 된 친구에게 출산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물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애가 나올 수 있도록 질 입구를 메스로 잘라 넓혔는데 하나도 안 아파. 왜냐면 다른 데가 너무 아프거든.” 핏기를 점점 잃어가는 내 앞에서 친구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뱃속에 넣고 다닐 때가 훨씬 편하다?”
20대 후반에서 30대를 넘어가니 여자 친구들과의 대화가 유부녀/싱글녀 테마로 나뉜다. 사실 출산·육아 무용담 폭격이 무차별 시작될 때,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모르겠다. 오해하지 마라. 나 역시 귀여운 포유류가 꼬물대는 유튜브 영상 앞에서 무장 해제되는 평범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도 애가 최소한 어느 정도의 형체를 갖췄을 때의 얘기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흥분하여 임신 소식을 알려오면서 우중충한 초음파 사진을 메시지로 보내올 때면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이봐, 우리가 아무리 가까워도 너의 자궁 사진을 보고 싶진 않다고.’
그럼 갓 태어난 아기는 귀여운가. 자궁 밖으로 막 나온 그들은 핏기가 가시지 않고 물에 불어있다. 우리 솔직해지자. 신비롭고 대견하며 감격적이긴 하지만 그 모습이 복슬복슬한 강아지, 고양이 새끼 사진보다 객관적으로 예쁜 걸 내 평생 본적이 없다. 막 출산을 마치고 엄마가 된 한 친구는 피곤한 얼굴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내 새끼라서 귀엽지 객관적으로 너에게 예뻐 보이진 않을 거야.” 정확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먼저 “와하하하! 저 아기는 정말 빨간 고구마 같아!”라고 할 순 없다. 축하를 기대하는 사람 면전에 저따위 자궁, 빨간 고구마 얘기나 늘어놓으면 누가 나를 상대해주겠나. 현실 속 나는 대체로 예의바르다. 의미 불명의 애기 옹알이 영상을 함께 핸드폰으로 보면서 “애가 엄마 닮아서 똑똑한가봐!”라고 열정적으로 맞장구치는 나의 사회성에 스스로도 새삼 놀라니까. (참고로 모든 문장 끝에 “꺅!”, “어멋!” 등을 붙여주면 효과 만점이다. 그리고 반드시 “딸이 너무 예쁘다”라고 하라. 성별이 헷갈리면 무조건 그렇게 말하면 된다고 하더라.) 물론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이 아기는 대체 어떤 정서와 논리를 표현하려는 걸까? 그냥 똥을 싸려는 건가? 미처 숨기지 못한 나의 혼란스러운 표정을 애기 엄마들은 대부분 ‘이 처녀는, 갓난애(우리애)가 어찌 이리 똑똑한지 놀란 모양이야.’ 하고 우쭐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줄줄이 소시지처럼 엮인 썸남 리스트를 늘 정기 업데이트 하던 잘나가는 친구들이 있다. 절친 중에도 대학 시절 내내 끊임없이 새 남자를 만나던 친구가 있다. 우리는 그녀에게 농담반 진담반 “서울·경기권 모든 남자를 다 만날 셈이냐.”고 묻곤 했다. 그녀는 그 남자 중 본인과 가장 잘 맞는 괜찮은 남자와 결혼하여 애 딸린 아줌마가 되었다. 이제 그녀는 서울·경기권 남자를 모두 만날 수 없지만 멋진 엄마의 인생을 새롭게 살고 있다. 모이기만 하면 남자 얘기를 신나게 하던 내 친구들이 결혼 후 출산과 육아, 살림, 남편 얘기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묘하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변한다. 처녀 시절 연애에 충실하고 열정적이던 그녀들은 결혼 후의 인생에도 충실하고 열정적이다. 그녀들은 손오공이 계왕권 쓰듯 자신의 내공을 100% 소진하면서 가정에 충실한 엄마와 아내가 되었다.
물론 애기 엄마들에게 하는 애 키우는 이야기(애 성대모사와 함께), 시댁 얘기, 남편 욕&자랑을 듣고 있노라면 슬슬 집중력이 떨어진다. 이 자리에 결혼이나 출산을 앞둔 친구가 추가되면 나는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탈출하곤 한다. 이제는 관심사가 달라진 유부녀 친구들의 대화에 낄 수 없고 흥미도 없으니까.
그날도 유부녀/싱글녀가 섞인 나의 절친들이 모여 다른 한 친구의 연애 얘길 하던 중이었다. 그 친구는 지금 만나는 남자와 결혼을 해도 괜찮을지 고민했다. 나는 유부녀 친구들에게 물었다. “결혼은 어떤 남자랑 하는 게 맞을까? 재력이나 집안 같은 조건 말고.” 한 유부녀 친구가 대답했다. “변화할 수 있는 남자. 기꺼이 변화를 받아들이는 남자.” 그러자 모든 유부녀들이 격하게 공감하며 한 마디씩 거들었다. 결혼 후 연애할 때와는 달라지는 관계, 새로 생기는 가족 사이에서 새로운 역할을 할 수 있는 남자, 출산과 육아로 어쩔 수 없이 겉과 속이 변해가는 자길 변함없이 응원하고 지지하는 남자, 엄마가 된 자신 옆에서 ‘아버지’로 함께 변할 수 있는 남자. 한 마디로 자신과 아내의 인생 변화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변화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배우자로 적합하다는 얘기였다.
‘섹스 잘하는 남자’ 따위를 대답으로 기대했던 나에게는 놀라운 답이었다. “근데 그런 사람인 걸 어떻게 알아봐?” 고민녀 친구가 물었다. 한 유부녀 친구가 대답했다. “예를 들어, 자기애가 지나친 사람은 연애도 쉽지 않지만 결혼 대상으로는 더 꽝이야. 자기 세계를 바꿀 생각이 없으면 결혼이 행복하기 힘들 거야. 남자뿐 아니라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지. 결혼은 단순히 식만 올리는 게 끝이 아니야. 보통 ‘결혼 생활’이라고 하잖아. 생활이 얽히니까 자기 세계가 너무 강한 사람은 본인도 피곤하고 상대도 피곤해. 그리고 오뚝이처럼 배가 부른 아내를 보면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해도 여자로 보이진 않겠지. 나도 이해해. 예쁘지 않을 거 아냐. 힘든 상황에서도 여전히 사랑 받는다는 안도감을 주는 남자가 요즘 세상엔 별로 없지. 근데 그런 남자가 있긴 있어! 우리 남편은 지금도 나한테...(이하 생략)”
이날 나는 다짐했다. 언젠가 연애 관련 칼럼을 쓸 때 그녀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기로. 콧구멍으로 다리가 빠져나오는 고통을 겪고도 살아남은 언니들 얘기니 뻥은 아닐 거다. 대학교 1학년 때, 교수님이 수업 중 했던 말이 생각난다. “세상에는 딱 두 종류의 남자가 있다. 아버지와, 아버지가 아닌 남자. 둘은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이다.”
나는 결혼에 대한 건설적인 조언을 해줄 수 없는 철없는 인간이라 유부녀 친구와 그 교수님의 말을 인용하는 것 외엔 딱히 더할 말이 없다. 연애를 넘어선 남녀관계에서의 돈독한 우정과 책임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해 보인다. 함께 밥을 나누고, 경험을 나누고, 어려운 시기를 나누고 나면 관계의 질이 바뀐다. 관계는 그런 식으로 강화되고 깊어지며 확대된다. 그 경험을 함께할 인생의 좋은 반려자를 찾길 바란다. 지금의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거라곤 이런 거? “어멋! 애기가 너무 예뻐요! 딸이죠? 꺅!”
걱정 마. 다 연습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