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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단백 Aug 07. 2023

04. 나팔관을 가지고 떠난 나의 천사

2%의 확률인데 나에겐 100%였던 자궁 외 임신

희망은 참으로 재앙 중에서도 최고의 재앙이다. 희망은 인간의 괴로움을 연장시키기 때문이다.
-니체


결혼 5년 만의 임신.

1년간 노력하면서 임테기 한 줄을 볼 때마다 알게 모르게 점점 지쳐갔었던 것 같다. 임신이라는 병원의 문자를 받고 딩크를 고민하던 순간이 있긴 했나 싶을 정도로 뛸 듯이 기쁘고 한편으로는 안심이 됐다.

남편은 넘치는 행복을 주체 못 하는지 혼자서 이것저것 알아보고 꼼짝하지 말라며 지극정성으로 대해 줬다.

조금 이른 감이 있었지만 태명은 뉴욕 가기 전에 우리에게 왔으니 애플이로 결정했고, 남편은 철저한 계획형 답게 산후조리원 비교분석 PPT를 만들어 내 앞에서 발표를 했다. 유튜브에서  태아성장 다큐를 챙겨보는 남편이 웃기고 귀여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따스하고 행복했다.


그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절절히 느낀 주말이었다.  나는 정말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지냈고 배는 여전히 살짝씩 아팠지만, 주말 동안 안정을 취하고 월요일 초음파를 보러 가면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 이 행복이 정말 내 것이 맞을지, 얼떨결에 찾아온 행복이 마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배가 계속 아픈 것이 두렵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행복은 너무 짧았다.



월요일 대망의 초음파 보는 날.

회사에는 반차를 내고 남편과 설레는 마음으로 같이 병원으로 갔다.

지난번 임신이 아니라고 단정하듯 말한 선생님은 신뢰가 가지 않아 평 좋은 선생님으로 담당의를 바꿔서 진료실로 들어갔다. 이번 선생님은 얼굴에서부터 따스함이 느껴지는 좋은 분이었다.


- 안녕하세요 임신이시네요! 지난번에는 아기가 너무 작아서 안보였을 수 있어요~  

- 네 선생님, 그리고 저희가 내일모레 여행을 잡아놨는데... 비행기를 타도 될까요?

- 멀리 가는 건 안 좋은데 , 일단 초음파를 볼까요?


그리고 들어간 초음파실.

한참 초음파로 이리저리 보시던 선생님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심각해 보였다.


-아기집이 보이지 않아요. 오른쪽 나팔관에 피가 고인 걸로 보이는데 자궁 외 임신이 의심되네요. 많이 안 아프셨어요?


심장이 쿵.


-지난주 진료본 날 저녁에 많이 아팠어요.

-여행이 아니라 오늘 긴급수술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이거 잘못하면 사망할 수도 있는 거예요. 큰일 나요...

-네?


이게 무슨 일인가... 잠시 사고가 정지되었다.

자궁 외 임신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부원장님, 처음 진료했던 선생님까지 세 명이 내 초음파를 보고 지금 내 상태가 어떤지에 대해 토론을 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로 멍하니 누워있을 뿐이었다. 남편이 보고 싶었는데 남편은 초음파실 밖 진료실에서 소리만 듣고 있어서 더 무서웠겠지.


초음파를 끝내고 생소한 자궁 외 임신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자궁 외 임신은 수정란이 자궁으로 와서 착상해야 하는데 이동하다가 어떠한 이유로 다른 곳에 착상해 버리는 경우, 아기가 성장하면서 자궁이 아닌 늘어날 수 없는 장기는 탄력이 없기 때문에 터져버린다. 그래서 금요일 배가 그렇게 아팠던 거고 오른쪽 나팔관은 그때 파열된 거였다. 파열되기 전이라면 항암주사를 맞아 유산을 유도하지만 잘 안될 경우 주사도 맞고 수술도 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이유에 대해 물어보자 모체의 탓이 아니충분히 다른 한쪽 나팔관으로 임신이 가능하다고는 하는데, 수정 잘하고 이상한데 착상한 건 내 몸에 문제가 있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 괴로웠다.


그리고 다시 한 피검사. 지난 피 검사일로부터 3일이 지났으니 임신 호르몬 수치가 최소 두 배가 되어야 했는데 너무 더디게 올라가는 수치였고, 확실히 자궁 외 임신이라는 말에 긴급복강경 수술이 결정되었다.


난 아기를 보러 왔는데... 

바로 아기랑 이별할 준비를 해야 했다.

1인실이 없어 6인실에 산모들과 같이 입원했다

모든 것들이 몽롱했고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아서 눈물도 나지 않았다.

산모님에서 환자분으로 바뀌는 호칭, 갑자기 밟게 된 입원 수속, 산모들이 입는 펑퍼짐한 수술복, 수술 시 뿌리는 유착방지제 동의 싸인까지 다 비현실적이었다.  


평생 입원은 커녕 병원조차도 잘 가지 않는 나인데, 제왕절개하러 온 것도 아니고 난관절제 전신마취 수술이라니 단 한 번도 예상해 보지 않은 경우의 수였다.  난 내 아이를 본 적도 없는데 수술이라니 현실감이 없어 수술대기실에서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남편을 달래주는 여유까지 부렸다.

 

그리고 전신마취를 하는 수술이라 일단은 가족에게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친정에 알리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물에 젖은 듯 먹먹했다.


-엄마가 갈까? 아파서 어떡하니 우리 딸...

-아냐 보호자 한 명밖에 안 된대. 나 괜찮아~


지금까지 멀쩡했는데 이런 소식으로 연락하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팠다. 엄마가 제일 손주를 바랐는데... 좋은 이야기는커녕  상하는 이야기만 전하니 괜히 전화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갑자기 맞이한 불행에 내 비관적 사고회로가 무한으로 돌기 시작했다. 

그래.  인생에 쉽게 오는 것은 없었지?

이제 좀 행복해지나 했더니 시궁창으로 처박히는 이 기분... 여러 번 겪어봐서 낯설지도 않았다.  


하지만 왜?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자궁 외 임신은 전체 임신의 2%라는데 로또 5천원도 잘 안걸리는 내가 왜 그런 확률에 당첨된 걸까?

감히 깜냥도 안 되는 내가 아이를 가진다고 해서 있는 나팔관마저 빼앗아가는 벌을 받는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노력조차 하지 말걸...

그냥 딩크로 살 걸... 

 세상이 끝난 듯 오만가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남편에게 너무 미안하고, 아이 모습도 한번 못 보고 배에 칼부터 대야 하는 내 인생이 불쌍하고, 길도 못 찾는 아기가 원망스러웠다.


진료를 받고 4시간 뒤, 나는 차가운 수술대에 손발이 묶였고 내 첫 번째 아기천사는 그렇게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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