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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Jun 28. 2019

당연한 줄 알았지만, 당연하지 않은 직장인의 삶

직장 밖의 세상에 산다는 것


친한 지인이 인스타그램에 퇴사 소식을 전했다. 남들이 보기엔 이상한 일 투성인 꼰대 회사였지만, 요즘 시대상에 맞지 않는 성실한 태도로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마음이 쓰였다. 누군가에겐 화려한 완장, 누군가에겐 그저 족쇄일 사원증을 맨 직장인들이 가득한 정자동의 한 레스토랑에서 백수 일주일 차 지인을 만났다.   


나는 당연히 마흔까지는 별 일 없이 회사를 다닐 줄 알았어


공식적인 백수의 시간인 평일 낮, 평소 회사 다닐 때 꼭 해보고 싶었다는 낮술을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면 자의이던 타의이던 조직을 벗어나게 된 나이가 생각보다 어리고,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 막막하고, 직업으로 연결할 사소한 취미 하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20대였다면 그 회사가 이상해서, 개인이 능력이 부족해서 퇴사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을 텐데 지금은 그녀의 선택과 상황이 온전히 이해가 갔다. 그리고 당장 나의 일, 남편의 일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이 극도의 공포감을 가져왔다.


학창 시절부터 하고 싶은 꿈이 명확한 편이었던 나는 인생의 길이 선명한 편이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언론홍보학과에 진학하는 게 답이었고, 졸업 후엔 콘텐츠와 관련된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곳에 입사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게 콘텐츠와 관련된 직업을 가지고 회사를 다니면서 사원, 대리, 과장, 차장, 부장을 거쳐 작지만 나의 색이 있는 회사를 차려 대표로 커리어의 마지막 정점을 찍는 인생. 그 길의 중간에 인생을 함께하고픈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토끼 같은 자식을 두고, 풍족하진 않지만 돈 걱정 없이 주말마다 마트에서 카트를 채우며 알콩달콩 살림을 꾸리는 삶을 당연하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육아휴직을 하고 한시적 퇴사자의 삶을 살면서 당연한 줄 알았던 직장인의 삶을 유지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리고 30대 초반, 회사의 허리라 불리는 많은 대리와 과장들이 자발적으로 그 길을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의 시대엔 세 개의 직업으로 산다는 연구 결과를 이제 현실로 마주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럼에도 최대한 오랫동안 직장인으로 살고 싶어

얼마 전, 회사를 다닐 때 만들어 둔 마이너스 통장이 만기가 되어 대출 연장 안내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상담원은 회사의 재직 확인이 필요하고, 재직 확인이 불가하면 대출 연장이 불가하다는 당연한 안내를 했다. 휴직자도 재직확인을 받을 수는 있지만 전화를 끊고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때에도 휴직 중엔 '주부'의 카테고리로, 회사에 다니는 남편의 신용을 통해 발급을 받을 수 있었다. 회사를 다닐 땐 느껴보지 못한 묘한 박탈감과 자격지심이 밀려왔다. 평범한 직장인도 사회에선 하나의 계급이자 권력이었다. 


물론 회사를 다니며 늘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내 마음과 달리 흘러가는 회사의 상황에 세련되지 못하게 화를 낸 적도 많고, 오래된 연인처럼 회사 권태기가 와서 단순히 월급이 목표인 삶을 산 적도 있다. 사랑을 버리고 부자랑 결혼해서 지긋지긋한 회사생활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물론 현실은 선배들이 하지 말라던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하는) 생계형 워킹맘이 되었지만!


지난 1년간의 육아휴직은 아이에게, 가정에게 득이 되지만 나 개인에겐 버리는 시간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일 년이 다 돼가는 시점에 돌아보니 나에게도 분명 득이 되는 것이 있다. 하나는, 열심히 재테크를 공부해도 급여 외 10만 원을 벌기가 어렵다는 점을 배웠다. 두 번째는 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과의 에너지에서 힘을 받는 외향적 인간이라는 점을 느꼈고, 세 번째는 아침 9시에 출근하고 6시에 퇴근하는 나의 직장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이들의 시간과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일 년 남짓된 아이의 희생까지. 그래서 직장에 앉아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감사한 일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직업을 대하는 태도가 더욱 진중해졌다.


요즘 포털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검블유를 무척 재밌게 보고 있다. 잘생긴 연하남과의 로맨스에 설렘을 느끼기도 하지만, 자신이 만든 서비스를 사랑하고 사회적 책임을 고민하고 업무에서, 사람 관계에서 강약을 유연하게 다루는 여자 커리어우먼들의 이야기라 몰입도가 높다. 매일 밥 먹이고, 기저귀 갈고, 아이가 자는 시간을 쪼개 집안일을 하는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 업무를 계획하고, 달성하고, 열정과 에너지를 쏟은 후 얻는 달콤한 진짜 휴식이 있는 직장인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임수정처럼 예쁜 정장과 스틸레토 힐을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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