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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Jun 13. 2022

100일 아기랑 제주한달살이

엄마도 마음껏 놀 수 있어요.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을 떠나기 시작한 이후로, 나 자신을 위한 온전한 여행은 어려워졌다. 제주도의 푸른 바다를 앞에 두고 뽀로로파크에 가거나, 남편의 해녀체험을 위해 아이들과의 독박 육아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나에게 제주에서의 24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떤 여행을 할까?



1. 요가로 시작하는 아침 (@키아나요가)

스튜디오를 채우는 인센스 향, 자신의 몸에 집중하는 사람들의 에너지, 그리고 내 몸이 알려주는 오늘의 컨디션. 살람바 시르사아사나(머리서기자세)로 요가 숙련도를 뽐내지 않아도 근육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집중하는 시간은 더 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2. 독립 서점에서 책 고르기 (@책방소리소문)

책을 읽는 것보다 책을 사는 것이 더 좋은 전형적인 뽐내기 스타일의 독서 습관을 가지고 있지만, 책의 트렌드를 살펴보고 내용이 궁금해지는 책을 사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 특히 책방 주인의 색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대형서점에서 보기 힘든 독립 출판물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독립서점 탐방은 나의 최애 취미. 특히 이번에 방문한 소리 소문처럼 큐레이션이 잘 되어 있고 감각적으로 꾸며진 책방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게 된다. 



3. 커피와 책 읽기 (@카페느랏

잘 내린 핸드드립 커피를 컵 받침이 있는 예쁜 컵에 담아 서점에서 고른 책의 첫 장을 편다. 생각보다 별로인 책일 경우 과감하게 함께 산 다른 책의 첫 장을 편다. 꼭 하나의 책이 아니더라도 좋다. 내가 펼친 한 장에서 지난 사랑이 떠오르기도 하고, 서툴고 상처투성이였던 지난날이 생각나 고개를 휘저었다가, 햇살처럼 환하게 빛난 화양연화 같은 아름다운 순간으로 이동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4. 소품 숍 투어(@수풀, 서쪽가게) 

머리도 식힐 겸 쇼핑에 나선다. 뻔하디 뻔한 관광지 기념품 숍은 시간이 아깝다. 쉽게 보기 힘든, 감각적인 제품들이 큐레이션 되어 있는 소품 숍에 가면 가슴이 설렌다. 이미 집에는 평생 쓸 컵과 식기가 있지만, 35살의 제주를 떠올리게 할 예쁜 소품을 신중하게 고른다. 집에 가서 커피 한 잔 내리며 아침을 시작하면, 제주에서의 여유와 행복이 떠오를 것 같은 하늘색 컵을 샀다. 


          


5. 미술관 방문 (@김창열미술관) 

대형 전시도 좋지만, 작은 미술관도 좋다. 김환기 미술관이 그랬고 제주도의 김창열 미술관이 그랬다. 작가에 대한 지식도, 작품에 대한 정보도 없었지만 운 좋게 만난 도슨트의 설명으로 한 사람의 인생과 작품관을 배운다.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인 물방울을 무념무상 지켜보다 보면 어느새 몇 시간이 훌쩍 가버린다. 




6. 플리마켓

그 지역에서만 열리는 작은 장터를 찾는 즐거움도 여행의 묘미 중 하나이다. 셀러들이 정성껏 가지고 나온 제품들을 살펴보고, 현금으로 거래하는 묘미를 살려 천원 이천 원 흥정도 해본다. 길을 지나다가 플리마켓을 만나는 행운도 좋지만, 인스타그램 검색 몇 번으로 찾을 수 있는 플리마켓 정보를 찾아 낯선 곳으로 몸을 향한다. 그렇게 우연으로 도착한 동네일수록 아름다운 공간을 더 많이 찾을 수 있다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제주의 힙스터들이 셀러로 참여한 것 같은 즐거운 플리마켓을 구경하고 예쁜 과자점에서 에그타르트를 먹으며 작은 힐링을 더했다. 




7. 와인으로 하루를 마무리 (@제주멜즈, @소랑호게) 

사실 와인숍의 와인들은 마트보다 가격이 비쌀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몇 천 원의 손해를 보고라도 와인숍을 찾는 이유는 와인을 설명하는 사장님들의 에너지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오고 가는 몇 마디 속에 손님의 와인 취향을 찾고, 팔고자 하는 의지보다는 와인에 담긴 스토리와 감성을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협재에서 만난 멜즈의 사장님 역시 수 십 병의 와인을 설명해 주셨고, 결국 내 입맛에 찰떡궁합인 와인을 구매할 수 있었다. 



제주도 돌담집 마당에서 불멍하며 먹었던 내추럴 와인, 그리고 사장님이 내어주신 매콤한 파스타는 여행의 여독을 풀어주기 적당했다. 친구와 나는 이곳에서 쏜살처럼 흘러버린 20대와, 안정하지만 묘하게 더 불안한 30대의 고민들을 쏟아 놓는다. 음악과 술 그리고 밤공기가 있는 제주 도서의 와인은 감히 도시의 와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풍미가 담겨있다.


참 쓰고 보니 내 취향이 가득 담긴 즐거운 여행. 이 모든 것을 하루에 할 수는 없었지만, 이제 목을 가누기 시작한 100일 아기&5살 남자아이와 함께한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모두 할 수 있었다. 어린아이와 한 달 살기를 떠난 것도 대단하지만, 육아로 고된 일상 속에서도 좋아하는 여행을 할 시간과 에너지를 냈다는 것이 스스로 참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내가 35년 동안 발견한 나의 취향이 모두 압축된 하루.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운 제주 여행이 참으로 오랫동안 기억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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