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하 Jun 22. 2020

장기 여행자의 여유

두 달 동안 놀며 적응하기


악몽 같던 출국이 정말로 액땜이었나 보다 싶을 정도로 밴쿠버에서의 적응은 꽤 순조로웠다. 며칠 만에 시차 적응도 완벽하게 했고, 레인쿠버는 각오했던 만큼 비가 매일 오진 않았다. 오랜만에 혼자 떠나온 여행이라 적막함이 반갑기까지 했다. 생각이 필요 없을 만큼 몸에 익은 하루를 살다가 매일 무얼 먹을지 어딜 갈지 어떤 일을 할지 그려보는 일도 오랜만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그날그날의 일정을 짰다.


천천히, 하지만 계획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처리해가는 일은 즐거웠다. 한 달 동안 지낼 첫 방으로 이사를 했고, 한국에서 컨택했던 회사와 첫 면접을 봤다. 한 달 후부터 오래 지낼 곳을 찾기 위해 첫 룸 뷰잉도 했다. SIN과 은행 계좌, 도서관 카드도 만들고 첫 밋업에도 참여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나의 새로운 일상을 짜는 일이 기꺼웠다.


걸어서 바다에 갈 수 있다니! 집에서 10분밖에 안 걸려!

새로운 일상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건 걸어서 바다에 다녀올 수 있다는 것.

통영에 다녀왔을 때, 동네 바다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걸어서 언제든 갈 수 있는 바다가 있었으면 좋을 텐데. 그 동네 바다가 생겼다. 딱 한 달 살 다운타운 집에서 걸어서 10분에서 15분만 가면 바다를 만난다. 바다에 걸어가 보니 여름까지 여기에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겨울에도 이러면 여름엔 얼마나 더 예쁠까. 기다란 바다 산책길을 걸으면서 밴쿠버가 조금 더 좋아졌다.


첫 일 주일에 만났던 풍경들


밴쿠버에서의 첫 두 달간은 주로 바다를 보러 가거나, 도심을 걷거나, 밋업에 나갔다. 언어교환이 아닌 목적의 밋업에도 종종 나갔는데, 보드게임 밋업도 그중 하나였다. 사실 밋업 장소인 펍에 다들 끼리끼리 앉아있는 걸 봤을 땐 혼자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자신이 없어서 그냥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일단 왔으니까 들어가는 보자, 집에 가더라도 게임 한 판은 하고 집에 가자, 나를 달래서 겨우 펍에 들어가 호스트랑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결과는 대성공. 새로운 게임을 많이 배웠고, 한 게임에서는 에이스가 되어 같은 팀 친구들한테 박수도 받았다. 펍이 문을 닫을 때까지 게임을 하고, 볼이 빨개질 정도로 열중했던 우리 테이블 친구들과 함께 맥도널드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같이 사 먹고 인스타그램을 교환하고 헤어졌다.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꽤 뿌듯했다.


요즘은 하는 것이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리고 아직까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했을 때 늘 좋은 결과를 얻고 있다. 퇴사도, 캐나다행도, 보드게임 밋업도. 안 했으면 어떡할 뻔했어, 그런 마음이 들 정도로. 매번 첫발을 떼는 것이 어렵고 가끔은 눈 딱 감고 한다는 심정으로 하기도 하고 그 다음다음 스텝도 쉽지 않을 때도 있지만 움츠러들려는 마음을 설득해가면서 조금씩 해보려고 한다. 그게 즐겁다. 대단한 일은 아니어도 왠지 성취감도 조금 느껴지고.


퇴사를 하면서, 앞으로도 어디에서든 내 촉이 '이건 아니다'라고 판단한다면 자책 없이 도망치겠다고 생각했다. 지체 없이는 좀 어렵겠지만 자책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마음먹으니, 정말로 도망쳐야 할 때와 두려워서 혹은 어설퍼 보이고 싶지 않아서 도망치고 싶은 때를 구분하게 됐다. 요즘은 두 번째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한 번 해보는 방향으로 내 기준을 가다듬어 본다. 낯선 곳에서 뉴커머로 지낸다는 건 새로운 나를 발견해가면서 새로운 기준을 세우고 그렇게 해보는 기회를 얻게 되는 일인 것 같다. 내겐 조금 낯선 긍정적인 기류지만, 어쨌든 나는 지금의 내 태도가 꽤 만족스럽다.



장기 여행자는 여유롭다. 가보고 싶던 곳을 가기로 한 날에 비가 오면 다른 날 가면 된다. 오늘 피곤하면 조금 쉬고 다음 날 다시 움직여도 된다. 며칠을 침대에서 뒹굴뒹굴해도 이력서를 조금 천천히 만들어도 유명한 카페에 가는 일을 좀 미뤄도 괜찮았다. 나는 장기 여행자니까. 두 달을 그렇게 천천히 밴쿠버와 친해졌다. 좋아하는 장소가 생기고 가끔 만나는 친구도 생겼고 오래 살 방으로 이사도 했다. 혼자 하이킹도 가고 밋업에서 만난 친구가 추천해준 호수에도 놀러 갔다.


그러고 나니 이제 일을 할 힘이 생겨서, 여행자에서 생활인으로 돌아오면서 이력서를 돌리고 면접을 봤다. 생활인으로서의 밴쿠버살이도 슬슬 시작되었다. 그리고 대망의 첫 출근날, 캐나다가 국경 폐쇄를 선언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액땜 같던 출국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