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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여 Dec 09. 2021

월요일 7시부터 사귈까요?

- 3편 -

연애와 결혼 사이 공황장애 매거진 (brunch.co.kr) 매거진에서 시리즈로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




도톰한 니트 하나로 충분했던 3월의 어느 날 우리는 네 번째 데이트를 했다. 시간이 11시밖에 되지 않아서 점심을 먹기에는 일렀다. 그가 봐 둔 집 근처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나는 네이비색에 꽃무늬 자수가 새겨진 니트를 입었고 그는 검은색 니트를 입고 나왔다. 하의는 둘 다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 운동화 두 켤레가 나란히 걸으며 내는 타닥타닥 소리가 조용한 골목을 울렸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그와 팔짱을 끼고 싶어졌다. 지금 내 곁에 선 이 사람이 참 좋아서 그냥 걷기가 아쉬웠다. 그렇다고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니니 손을 잡기는 부담스럽고.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팔짱은 '남'과 '남자 친구' 사이에 있는 썸남과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스킨십이랄까.


그래서 물었다. "저 팔짱 껴도 돼요?"

"네 그럼요!" 그는 흔쾌히 왼쪽 팔을 내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팔짱을 끼고 카페로 향했다. 카페는 2층 규모로 꽤 큰 편이었는데 당시 유행하던 플랜테리어 분위기로 잘 꾸며놓은 곳이었다. 이미 인스타그램에서 입소문이 났는지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였다. 겨우 2층 구석에 자리를 잡고서 다시 1층에 내려가 주문을 했다. 메뉴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그가 내 사진을 찍어주었다. 어떤 앱으로도 쌍수 때문에 빨개진 토끼눈을 가릴 순 없어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따뜻한 바닐라 라떼, 초콜릿 케이크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간격이 가까워서 양 옆에 앉은 사람들과 거의 일행처럼 보일 지경이었지만 그와 같이 있다는 사실에 그저 신이 났다.




내 mbti는 INFJ다. 이것도 인프제의 특징 중 하나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한 번씩 말을 '툭' 던질 때가 있다. 이때도 그랬다.

"우리는 무슨 사이예요?"


그를 당황시키려고 한 말은 아니었으나 그는 당황했다. 나중에 듣기로 내가 질문을 한 순간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자기가 대답하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단다. 공기마저 멈춘 것 같았다나 뭐라나.


더도 덜도 없이 꼭 세 번, 삼세번이라는 말이 있듯이 보통 소개팅 3번이면 결정이 나기 마련이다.

첫 만남, 이 사람이 내 취향인지 아닌지 파악하는 단계

두 번째 만남, 이 사람과 내가 잘 맞는지 확인하고 선택에 확신을 다지는 단계

세 번째 만남,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사귀는 단계


이렇게 쉽고 간단한데 이 남자와는 어느덧 네 번째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물론 쌍꺼풀 수술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있긴 했지만. 그래서 정말 궁금한 마음에 우리가 무슨 사이냐고 물었던 것이다.


몇 초간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대답했다.

"저희는.. 좋은 사이죠 ㅎㅎㅎ"


곧이어 그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만나보고 싶다는 식으로 대답했던 것 같다. 나는 '그렇구나. 알겠어요.' 하고 다른 주제로 넘어갔고. 기대한 답변은 아니었지만 정말 그의 생각이 궁금해 물었기 때문에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나와 이 사람의 속도가 다르구나, 아쉽지만 나는 이 사람이 좋으니 맞춰야겠다고 생각했을 뿐.


카페는 예뻤지만 이야기를 오래 나누기 좋은 장소는 아니라서 얼른 커피와 케이크를 해치우고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정처 없이 걸으며 계속해서 입을 움직였다. 갤럭시 워치에 쌓이는 발걸음 수만큼 나와 그에 대한 쌍방의 정보가 쉴 틈 없이 쏟아졌고 각자의 눈과 귀를 총동원해 입력하기 바빴다. 그렇게 정신없이 '그'라는 폴더에 데이터를 쌓다 보니 어느새 눈앞에는 봄날의 한강이 잔잔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걷는 걸 그리 좋아하지도 않고 잘하는 편도 아니다. 그런데 서로의 팔과 팔을 겹치는, 팔짱을 낀 데서 오는 온기와 설렘 때문이었을까. 한참 수다를 떨다 정신을 차려보니 거의 3km가량을 걸었던 것 같다. 슬슬 다리도 아프고 배가 고파서 되돌아가기로 했다. 초록 잔디는 밟으면 안 되니까 잔디 옆 보도블록 위를 함께 걷던 그때 그가 나를 불러 세웠다.


"소여 씨, 아까는 제가 말을 잘못한 것 같아요. 우리 사귈까요?"


1시간 전만 해도 시간을 갖고 만나고 싶다더니 갑분 고백을 하는 남자와 이런 상황이 웃긴 나. 그래서 아까는 좀 더 만나보자고 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러자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우리 월요일 7시부터 사귈까요?"


오늘 일요일인데 내일 저녁부터 사귀자고? 이 실없는 농담은 뭐야 장난해? 그를 만난 이후 늘 즐거웠던 나도 이때는 좀 짜증이... 그냥 오늘부터 사귀면 되지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고 핀잔을 줬다. 그렇게 우리는 그날부터 사귀게 되었다. 고백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물었다. 왜 마음을 바꿨냐고. 그러니 자기는 원래 오늘 고백을 할 계획이었단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카페에서 무슨 사이냐고 물어서, 옆구리 찔러서 급하게 한 것 같은데. 현재까지도 찜찜함은 남아 있으나 그냥 먼저 고백받은 걸로 쳐야지 어쩔 수 있나.


사귀고 나서야 그가 자만추 파라는 걸 알았다. 소개팅 경험도 단 한 번, 스무 살에 한 거라 1회로 쳐주기도 민망한 수준. 이후에 사귄 여자 친구들은 모두 자만추로 만났다 보니 으레 소개팅을 하면 첫 데이트가 끝나고 집에 잘 들어갔냐고 물으며 애프터 신청을 한다는 걸 몰랐단다. 우리가 헤어질 때 밤 11시가 넘었으니 늦은 시간이라 연락하기가 뭐해서 다음날 오후에 한 거라고 나름의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나.


게다가 원래 자기는 소개팅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며 스스로를 변호하고 나섰다. 첫 소개팅 때 너무 어색하고 불편했던 기억이 강해서 30대가 돼서도 소개팅 제의를 모두 거절했단다. 그런데 회식을 하던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중학교 동창인 여사친이 전화를 걸어 소개팅을 제안했다. 한창 술에 취해 정신이 없던 그는 대충 '어어'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고, 다음날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카톡에는 내 이름과 번호가 남아있었다.


자취 4년 차, 동네 친구를 사귀고 싶어서 참석한 모임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몇 달을 함께 했지만 모임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와 연락이 끊어졌는데 몇 달 후 우연히 길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이후 우리는 한 번씩 만나 밥을 먹고 수다를 떠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마침 그녀에게는 중학생 때부터 친하게 지낸 남사친이 있었는데 불현듯 그와 내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바로 그녀는 소개팅을 주선했고, 그와 나는 상수역 1번 출구에서 만나 결국 사귀게 되었다. 1년 3개월 후에는 결혼식을 올렸고.


첫 만남부터 결혼까지 모든 단계가 순탄했다. 어느 날 찾아온 공황장애만 제외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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