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편 -
그와 몇 달쯤 사귀고 나서 우리는 태국으로 여름휴가를 가기로 했다. 국내여행 같았으면 부모님에게 말도 안 하고 갔겠지만 그래도 해외여행이기에 남자 친구와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히 부모님께서 서울에 올 일이 생겼다. 엄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남자 친구는 흔쾌히 부모님을 뵙겠다고 했다. 그렇게 성사된 첫 만남.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정장을 차려 입고 나타난 남편은 땀을 억수같이 흘렸고 우리 부모님은 그를 좋게 보셨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몇 달 후 나도 그의 가족을 만났다. 식사가 끝나갈 때쯤 시부모님께서는 우리 두 사람이 결혼을 서두르면 좋겠다는 뜻을 내비치셨다. 결혼 생각이 없었다면 애초에 나가지도 않았을 테지만 첫 만남에 결혼 요청 겸 허락을 받으니 얼떨떨했다. 소식을 들은 아빠는 어서 식을 올리라며 내 등을 떠밀었고, 9월 예식을 알아보러 간 곳에서 5월에 빈자리가 났다는 말에 그만 나는 결혼을 6개월 앞둔 예비 신부가 되었다.
허니문, 스드메, 혼수 등 준비할 게 어찌나 많은지. 우리는 결혼식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거침없이 달리는 롤러코스터 같았다. 그런데 결혼을 목전에 두고 그만 롤러코스터가 멈춰버렸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데이트를 하고 헤어지기 전에 그와 포옹을 했는데 지독한 된장 냄새가 났다. 나 역시 한국인으로서 된장찌개를 정말 좋아하지만 내 눈에 늘 멋있고 완벽하다고 생각하던 남자에게서 꼬리꼬리 한 된장 냄새가 나다니! 하필 입은 옷마저 된장 색이었다. 일명 된장 사태는 내게 인지 부조화를 일으켰고 결국 그에 대한 콩깍지가 벗겨지게 된다.
된장 사태로 인해 충격을 받은 건 맞지만 사실 이건 웃어넘길만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내가 공황장애를 겪은 이유는 바로 이 질문 때문이다.
'내가 이 사람과 결혼할 만큼 사랑하는가?'
내게 결혼은 너무나 큰 일이었다. 수능이야 망하면 재수하거나 점수에 맞춰 가면 그만이고 회사가 안 맞으면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을 찾으면 된다. 물론 돈과 시간, 노력이 들고 힘들겠지만 마음먹으면 못할 게 없다. 그리고 설사 실패하더라도 법적으로 아무 일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결혼은 다르다. 만인 앞에서 이 사람과 평생 사랑하겠다고 맹세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혼인신고를 하면 빼도 박도 못한다. 잘 풀리지 않으면 이혼에 도달하기 위해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결혼을 코 앞에 두고서야 내가 결혼한다는 걸 실감했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미리 체험해볼 수도 없는 일. 요즘같이 이혼이 흔한 세상에 결혼 실패의 리스크를 감수할 만큼 남자 친구를 사랑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나를 집어삼켰다.
남편 전에 만난 사람이 있다. 그때 나는 쉽게 삐지고 크게 화를 냈다. 상대방은 내가 왜 화를 내는지 몰랐고 회피 성향이었던 그는 동굴에 들어갔다. 그럼 나는 서럽고 속상해서 동굴 앞에서 발을 구르고 울분을 토했다. 몇십 번을 반복하니 어느새 나도 동굴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럼 우리는 짧게는 며칠, 길게는 일주일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다 누구 하나가 '뭐해?' 먼저 카톡을 보내면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 관계로 되돌아갔다. 그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상대방을 죽일 만큼 미워했다가 좋아하는 양극단의 감정에 자주 노출됐고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전과 남편과 한 연애는 북극과 적도로 비유해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달랐다. 집채만 한 파도가 치는 바다 같던 내 마음은 잔잔한 호수가 되었다. 내가 요구하지 않아도 남편은 넘치는 사랑과 배려를 보여줬고 나는 안정된 연애가 주는 안락함에 더없이 만족했다.
그런데 이 편안한 연애가 발목을 잡았다. 내가 남자 친구를 결혼할 만큼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이 가슴속에 싹트자, 평온한 관계가 오히려 불안의 시초가 된 것이다. 미드 섹스 앤 더 시티에도 이런 장면이 나온다. 이기적인 미스터 빅과 헤어진 주인공 캐리는 착하고 따뜻한 에이단과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는데, 그녀는 밤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깬다. 이유는, 연애가 너무 편안해서.
대학, 취업, 자취까지 모든 과정을 홀로 결정하고 책임졌던 나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내리기 쉽지 않았다. 차라리 심장박동수를 검사해서 100 이상이면 결혼 가능! 이렇게라도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런 감정을 주변에 속 시원히 털어놓지도 못했다. 내 불안과 의심이 정답일까 봐.
나도 모르게 점점 불안에 잠식되어가던 어느 날, 나와 남자 친구는 가톨릭 교회에서 운영하는 피정에 참석했다. 주로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나 이제 갓 식을 올린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신부님과 기혼자 봉사자가 원활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이다. 가톨릭 신자는 결혼 전에 이러한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데, 몇 시간짜리 강의로 대체할 수도 있었지만 열혈 신자인 엄마의 바람에 따라 우리는 피정에 들어갔다.
2박 3일 내내, 눈을 뜨고 감는 순간까지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강의하는 사람은 결혼을 하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고, 강의를 들으러 온 사람들은 자신의 결혼식에 대해 떠들어댔다.
나도 그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매일 밥을 먹는 자리가 바뀌기 때문에 새로운 커플을 만날 때마다 각자의 결혼 준비에 대한 정보를 나눴고, 하루 종일 강의를 들으며 질문이 쓰인 노트에 답변을 적었다. 그리고 남편과 노트를 돌려 읽으며 결혼에 관한 서로의 생각을 나눴다. 프로그램의 취지만 보면 참 좋다.
피정 첫날밤 새벽 4시쯤 눈이 떠졌다. 나는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모두가 결혼에 대한 기대로 들뜬 이곳에서 나는 이방인이었다. 결혼이 고작 몇 달 밖에 남지 않았는데 남편에 대한 마음도, 결혼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가로등 없는 고속도로처럼 막막하고 깜깜했다.
피정 이후로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는 증상이 나타났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가 그랬고 집에 혼자 있을 때도 그랬다. 남편이 나를 만나러 온다고 할 때도 그랬고 같이 저녁을 먹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혼수 가구를 보러 판교로 가던 길에도 그랬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면 불안감이 엄습했고 머리는 부정적인 생각을 빠르게 생산하며 나쁜 결말을 그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주변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심호흡을 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 애썼고 너무 힘든 날에는 우황청심환을 사 먹었다. 그러면 잠시 동안 괜찮아졌다. 그러나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래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