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의 토템

찬달라에서 브라만으로

by 하루오

공부방 문을 열면 하얀 빛이 쏟아진다.

“쌤, 눈뽕 오지는데요.”

“천국의 입구는 찬란한 법이다.”


스마트팜 불빛이다. 공부방 입구에 상추와 로케트셀러드가 자란다. 빛이 눈에 익고 나면 스마트팜 위 어둠 속에 부라린 눈, ‘미쓰고’가 보인다. 대형 고릴라 인형은 사천왕처럼 공부방을 수호한다. 악귀야 물러가라.


고릴라 인형은 집 근처에서 주웠다. 뜯어진 데도 없고, 냄새도 나지 않았다. 털이 검어 때가 얼마나 탔는지 알 수 없어서 좋았다. 빨아서 세재 냄새만 입히면 그뿐이었다. 어차피 빨래는 내 일이 아니라 세탁기 일이었다. 아직 스마트팜을 들이기 전이었다. 공부방 출입문을 열었을 때 휑하게 드러나는 싱크대를 가리고 싶었다. 이 인형을 냉장고 위에 올려두면 꼭 맞을 듯했다.


문제는 고릴라가 워낙 커서 세탁기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솜덩이니 어떻게든 구겨질 거라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드럼 세탁기 입구에 배가 걸렸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구나 하며, 동전을 챙겨 근처 빨래방으로 갔다. 집에 세탁기가 갖춰진 시대, 빨래방의 존재 이유이겠거니 했는데, 빨래방 세탁기도 고릴라 뱃살을 감당하지 못했다. 아, 이러면 나가린데. 다시 버리기에는 이미 우리는 꽤 눈을 맞춰 버린 다음이었다. 눈은 교감의 통로다.


별 수 없이 손빨래했다. 손빨래는, 설거지도 월중 행사고, 모든 빨래를 소재/색깔 구분 없이 세탁기에게 떠맡기는 인간이 보내는 파격적 환대였다. 일은 생각보다 커졌다. 내가 샤워하듯 고릴라 몸에 물을 뿌리고, 비누칠 하고, 거품을 냈다가 헹구면 될지 알았다. 거품이 잘 나지 않아 비누를 박박 문댔더니 헹굴 때 비눗물이 끝도 없이 나왔다. 뱃살이 비눗물을 번식시키는 듯했다. 비누칠 두 번 하려던 계획을 철회했다. 맑은 물이 나올 때쯤 대충 비누 냄새는 남았으니 되었다.


진짜 문제는 세탁이 아니라 건조였다. 생각지도 못했다. 미쓰고에게 사과해 가며 자근자근 밟아 물을 뺐지만 몸통이 두꺼워 안쪽은 속수무책이었다. 위를 짜든, 아래를 짜든 물은 중간에 고였다. 반쯤 포기하고 빨래 건조대 위에 얹어 놓았다. 잠시 후 손끝, 발끝, 뱃살에서 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쓰고, 손 많이 간다, 손 많이 가, 아래에 세숫대야를 바쳤다. 다른 대야, 대접, 김치 통까지 동원했다.


산 넘어 산, 그날 저녁부터 비가 내렸다. 자체 제습제 같은 녀석이 마르는 데는 사나흘쯤 걸렸다. 중간, 중간, 나도 하지 않는 드라이까지 했다. 그럭저럭 마른 미쓰고에게서는 비 맞은 개털 냄새가 났다. 아……, 미쓰고, 진짜 손 많이 간다, 손 많이 가.


또 빨래하기는 귀찮아 탈취제를 뿌렸다. 이사 올 때 엄마가 챙겨준, 그러니까 13년 넘게 off 안에 기적처럼 보존되어 있던 녀석들이 드디어 제 할 일 한 것이다. 어차피 쓸 일이 없으므로 양껏, 흠뻑, 적시다 시피 했다. 탈취제의 과학은 완벽했다.


너는 공부방에서 아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한 녀석은 자기 달라고 떼쓰기도 했다. 학생들에게 너는 ‘브라만’은 아니어도 ‘바이샤’는 됨직 했다. 만약 너를 주워 온 걸 알았다면 너는 불가촉천민 ‘찬달라’가 될 테니, 너의 신분을 숨겼다. 당근마켓에서 나눔 받았다고 둘러댔다. 문 앞이 아니라 길거리였을 뿐, 비대면 나눔이 행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너는 공부방을 지켜주는 토템이므로 내게 브라만이었다. 너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가 되살려 놓았으니 너는 내 편일 거라는 맹목적 신뢰감이 네 덩치만큼 묵직했다. 사회 철학자 로크에 의하면 신체는 자신의 것이므로 공유물에 신체 노동이 투입되면 대상의 소유권을 획득한다. 너는 공유물 정도가 아니라 아예 버려졌었으니, 너는 완벽한 내 것이다. 너를 들인 후, 밥 먹고 사는 일이 덜 고단해졌다.


나는 늘 빈 집을 드나들었다. 집에 들어갈 때도, 공부방에 들어갈 때도 나는 늘 빈 것 속으로 들어가 혼자를 완성했다. 빈 집을 드나들 때, ‘안녕’ 인사 나눌 눈이 있는 게 좋았다. 내가 구원해준 내 눈이다. 너는 내게서 아주 오래 안녕할 것이니, 이제, 마음 놓아도 된다. 그러니 너도 대답해도 된다. 부디 해주길 바란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