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통의 새 자리
남자 소변기를 예술작품으로 만들어버린 뒤샹의 [샘]을 의식했던 건 아니다. 그것이 무의식에 잠재해 있다가 표출된 욕망인지는 몰라도 그 순간만큼은 내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 화분으로 만들어 볼까?
골목에서 대형 폐기물로 버려진 변기통을 종종 보곤 한다. 우리 지역 부동산 업자 말에 의하면 이곳은 원룸 1,500여 채가 밀집한 대한민국 최고 원룸단지다. 15년 전 이야기고, 공터에서 원룸이 잡초처럼 자라서 지금은 더 늘었을 것이다. 그래서 20만 원 안팎 월세도 흔하다. 1년에 그 중 몇 개가 리모델링되는 건 세포의 생활사 같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때마다 변기가 버려졌다.
내 방에 둘 수는 없었다. 조금 큰 관 같은 방에 베란다도 없었다. 늘 생각뿐이었다. 내 방의 두 배는 됨 직한 공부방이 생긴 이후에는, 귀찮았다. 버려진 변기통을 대중교통으로 옮기는 건 번거롭다. 하지만 보강이 취소되어서 살짝 짜증나 합리성에서 이탈한 이날은, 욱 하는 마음에 저질러버렸다. 밤 8시 51분, 집을 나섰다. 공부방에 새 화분을 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변기 본체와 물통 부분이 분리되었다. 양쪽에 나사 하나씩으로 고정되어 있다니, 놀랍도록 허술했다. 혹시라도 수거해 갈까봐 물통은 풀숲에 옮겨 두고, 변기의 물부터 빼냈다. 장마가 채워 넣은 물 안에 담배꽁초가 가득 차서 엉망이었다. 준비해간 물티슈로 손이 닿을 부분을 대충 닦아 낸 다음 들어 봤다.
할 수 있을까? 망설여졌다. 무게도 무게지만 부피 때문에 자세 잡기도 애매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힘쓰는 건 딱 질색인 쪽이다. 축구나 농구보다 야구, 탁구, 테니스처럼 몸 부딪치지 않는 운동을 선호했고, 헬스장에 등록했을 때도 근력 운동보다는 유산소에 충실했다. 2022년 열 달 동안 18kg 감량할 때도 근력 운동은 안 했다. 방에 2kg짜리 아령 두 개와 7kg짜리 아령 하나가 있긴 한데, 그렇다, 있긴 했다.
50미터쯤 가다 쉬었다. 이게 말이 될까? 포기하면 편할 텐데 이야말로 사서 고생, 달밤에 뭔 지랄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집에 있어 봐야 이 날은 빈둥댈 것 같아서 다시 변기를 들어 올렸다. 에이 뭐, 들고 가다가 안 되면 거기 버리지, 하며 자세를 고치다 나름 편한 자세가 잡혔다. 어깨에 들쳐 메었다.
쉬었다 들어올리기를 반복하며 대학로 번화가를 관통해서 기어이 지하철역까지 왔다. 나중에 학생들이 부끄럽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런 건 없었다. 나는 나와 관계없는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는 편은 아니다. 이 일에서 중요한 것은 내 근력의 수행 능력과 민폐 여부였다. 나는 다리인가 허리 아팠을 때를 제외하면 거의 처음으로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이용했고, 밤에 대구로 나가는 사람은 드물었다.
시옷과 지읒으로 된 주문을 염불처럼 외워가며 무사히 공부방에 도착했다. 사후적으로 알게 된 것인데, 변기통 무게는 18.8kg이었고, 내가 변기통을 들고 이동한 거리는 최소 1.1km였다. 지하철 내부에서 이동한 거리까지 감안하면 1.2km는 이동하지 않았나 싶다. 변기통을 들쳐 메면, 0.1km는 굉장히 중요한 차이가 된다.
화장실로 가서 변기에 앉아 변기통을 씻었다. 세제를 뿌리고 청소솔로 박박 문질렀다. 이 거품 속에서 살아남는 바퀴벌레가 있다면, 그 생명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로 거품을 냈다. 물통은 무게도 덜 나갈 듯했고, 들기 편한 모양이니 덜 힘들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뭘 심을지 고민했다. 어항으로 꾸밀 생각도 했지만 배수구를 막을 확실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비닐 몇 개를 덧대고 테이프로 칭칭 감으면 궁상맞게라도 막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청소하려면 물까지 들어 있어 20kg은 족히 넘는 녀석을 상대해야 해서 포기했다. 뿌리가 상했는지 시들어가는 행운목을 옮겨 심을지, 아니면 꽃 한 송이를 심을지, 혹은 새로운 관엽 식물을 심을지를 따져 봤다. 답은 내지 못했지만 일단 화분은 갖춰두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왜 갑자기 당신들은 부지런해졌을까? 대형 폐기물은 한참 방치되더니 이번에는 지나치게 신속했다. 물통이 짠, 마법같이 사라졌다. 27장으로 완성되어야 할 포토카드 중 8장을 놓친 기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다. 아니, 물통을 우리 원룸 안쪽에라도 숨겨뒀어야 했다. 내가 안일했던 거다. 1년 안에 버려진 새 변기통을 발견하게 되겠지만, 과연 색깔이 맞춰질지 확신할 수 없었다.
주말 수업을 끝내고 월요일, 화분 만들기 작업에 착수했다. 가장 신경 쓰이는 게 물 빠짐이었다. 물받이를 대려면 변기를 바닥에서 띄워야 했다. 마침 공부방 인근 도로가 공사 중이었다. 인도를 손대면서 빼 놓은 보도블록에 눈이 갔다. 4개 정도만 가져가고 싶었지만 관뒀다.
‘다이소’에 가면 뭐든 있겠거니 했지만 역시 보도블록 벽돌만 한 답은 없었다. 상대는 흙이 차면 20kg이 넘어갈 화분이었다. 그걸 받쳐낼 내구력을 찾는 소비자가 없는 게 당연했다. 배수구에 깔 자갈이라도 살까 했는데, 역시 없었다. 대신 상상도 못했던 인조 잔디를 샀다. 잔디 위의 변기통은 잘 어울렸다.
받침대는 이면지로 대신했다. 이면지들을 맞물리게 접어서 3cm 정도 두께를 만들어 변기 아래에 괴었다. 생각보다 안정감 있었다. 색깔도 잘 맞았다. 그 공간에 예전에 편의점 도시락 사먹고 씻어둔 플라스틱 그릇을 오려서 물받이로 놓아뒀다.
행운목 흙 갈이 때문에 배양토는 40kg를 사둬서 흙은 넉넉했다. 작년에 사둔 자갈로 아쉬운 대로 배수구를 채우고 플라스틱 거름망을 막은 다음 배양토를 채웠다. 물통과 연결된 뒷면 구멍은 『서양 철학사』상, 하권으로 막았다. 책도 주운 거였다. 읽지 않아 알라딘 중고 서점에 팔려고 했지만 상권 상태가 나빠서 하권만 사겠다고 해서 그냥 보관하고 있던 거였다. 딱, 봐도 읽을 생각이 들지 않는, 전형적인 DP용이 제자리를 찾은 것이었다.
그 위에 라이언 인형을 얹고, 그 앞에 뚜껑 고정하던 구멍에는 파티용 하트 풍선을 꽂았다. 그리고 화분에는 개운죽 하나만 심었다. 이것들도 주운 것들이다. 그래서 작품명은 재생. 마침 내가 데리고 있는 수험생들은 모두 반수생들이서 즐거운 복선 같았다. 신이 지구를 창조한 직후 담배 한 대를 피웠을 때 느꼈음직한 뿌듯함이 내 맘에도 차올랐다. 신이 말하길, 내가 지구를 만들 때 말이야, 그런 기분으로 라이언과 개운죽 사연은 지금부터 하나씩 얘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