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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Apr 19. 2024

베트남 연인을 바라보는 즐거움

지하 1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내 앞에 서 있었다. 체구가 작은 검은 물체였다. 밤이 차갑다고 해도 롱패딩 입을 때는 지났다. 나는 별 생각 없었다. 내 앞에 아이유가 있든, 차은우가 있든 알 바 아니었다. 한 주가 마무리되는 오후 10시 무렵의 퇴근길, 집에서 몸을 눕히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사교육 강사는 지식 구멍가게의 육체 노동자였다. 토요일, 일요일 모두 10시간씩 떠들어댔다. 프로폴리스가 함유된 트로키제로 버텼다. 목에 딱딱한 열감이 박혔다. 기도가 울리지 않도록 허밍조차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혼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집에 가야 했다. 집에는 오래된 신발처럼 내 몸에 맞는 혼자가 있었다.


검은 롱패딩을 여자로 인식한 것은 지하철 개찰구를 빠져 나간 다음이었다. 지하도 기둥 뒤에서 색깔과 재질이 여자의 롱패딩과 같은 검은 물체가 스윽 미끄러져 나왔다. 여자를 놀라키려고 하되, 여자가 가슴 철렁하지 않도록 배려한 움직임이었다. 짜잔, 나타난 검은 물체는 활짝 웃는 남자였고, 내 앞에 있던 검은 물체는 남자의 소중함이었다. 똑같은 표정이 된 여자가 소중함의 팔을 덥썩 안았다. 소중함 한 덩어리가 나란히 걸어 갔다.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이 짧게 오갔지만 모두 웃음으로 번역되어도 무방해 보였다. 베트남 학생들이었다. 혹은 노동자였다.


나와 걷는 속도가 비슷했던 탓에 지상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도 나는 그들 뒤에 섰다. 끝이 둥글고 푹신푹신한 말들이 소곤소곤 내게로 벚꽃처럼 날렸다. 연인들에게 질투할 나이는 지났다. 한때, 관광지나 식당 낙서 ‘광수♡영숙’마다 하트의 가운데를 갈라 놓기도 했고, 글씨체를 흉내내 ‘광수♡영미’, ‘광수♡옥순’을 추가해 광수를 바람둥이로 만들어 놓기도 했지만, 질투도 열정이 있을 때나 했다. 세상은 알 바 아닌 군더더기로 변해왔다. 내 밥벌이가 아닌 것은 외계여서 내 세계는 외계가 가득했다. 이날, 내 앞의 연인들은 예뻤다.


대학가라 어린 연인들을 흔하게 봤다. 외국인 유학생뿐만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도 많이 살아 연인은 국적을 가리지 않았다. 어릴수록 끈적거렸다. 부모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난 처음과 그 근처의 연애는 남녀 모두 브레이크가 고장난 듯했다. 침대에 가까운 몸짓들은 카페나 길거리에서 거슬렸다. 그러나 내 앞의 베트남 연인은 내 안의 유교가 타협할 수 있을 만큼 꽁냥꽁냥 했다. 서로에게 집중하느라 내 시선을 의식하지 못했나 본데, 너희들 눈에는 밤 하늘에서 따온다는 허무맹랑한 그 별이 박혀 있었다.


여자 롱패딩 어깨에 모 전문대학 이름이 영문으로 찍혀 있었다. 내 밥벌이 세계에서 지방 국립대가 존재 허용 최저 기준이었으므로 4년제도 아니고 전문대학이 이름을 드러내는 일은 영문 모를 일이었다. 그곳은 특수학과를 제외하면, 고등 선행 들어간 중2들도 지금 당장 수능으로 입학 가능할 학교였다. 물론, 입시 세계의 잣대로만 본 편견이다. 어느 세계에나 그 세계를 지탱하는 삶이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중심 축을 자신에게 놓는 당당함이다. 그들 뒤에 선 20여 초 사이, 나는 편견에 근거한 소설을 썼다.


지방 대학은 저출산 여파로 벚꽃엔딩 중이다. 전문대는 더 심각했다. 교수는 전공 지식이 과잉된 영업직 사원을 닮아 갔다. 대학은 한국인 결원을 메꾸기 위해서 외국인을 수입했다. 한국어 가능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학은 외국인이 한국어도 모른 채 한국 학생들과 같이 강의 듣는 것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외국인도 강의는 중요하지 않았다. 학생 비자로 한국에 머무르며 돈을 버는 것이 중요했다. 다른 전문대에서 강의하던 시절, 나는 야간 아르바이트하고 수업 시간에 자는 것을 눈감아줬다. 출석 근거를 만들어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서로의 필요가 악수(握手)한 악수(惡手)가 지방 외국인 유학생의 실상이었다. 뭐가 되었든 모두들, 살고자 치열했다.


중국 학생들의 경우, 졸업 자체가 목적인 경우도 있었다. 집에 돈은 있지만 당장 본국에서 학업과 취업이 어려워 외국 대학 졸업 증명서라도 따고자 한 것이었다. 게임만 하기 부지기수였다. 일본 학생은 한국을 좋아하거나 공부가 목적이어서 한국인과 연애도 곧잘 했고, 괜찮은 직장을 찾아갔다.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학생들 다수는 당장의 일이 목적이었다. 학업을 병행하려는 학생도 일 때문에 학업이 지지부진해지기 십상이어서 대체로 학생과 노동자는 다르지 않았다. 합법과 불법 사이, 혹은 탈법의 공간에서 고군분투하는 학생이자 노동자인 외국인에게는 인간으로서 경외심이 들었다.


주말 끝에, 남자와 여자는 겨우 만났다. 밀린 과제가 있을 수도 있었고, 잔업과 특근이 있었을 수도 있었다. 각자가 한 주를 누구로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눈 앞에 생의 정답이 있었다. 팔짱을 끼고 깍지 낀 두 손은 정답이 공유된 확신이었다. 정답의 순간을 위해서라면 한 주가 누구여도 상관없었다. 차별과 착취의 시간을 견딜 수 있는 내구력은 상호확증적으로 자랐다. 저들은 언어도 모를 타국에서 어떻게 정답을 맞출 수 있었을까? 내 무능을 실감했다. 내가 유능한 한국어 화자라도, 학벌이 더 좋더라도, 키가 크더라도, 그들의 월급을 어쩌면 주급으로 벌더라도, 나는 명백히 오답 중이었다. 내가 가는 곳은 빈 방이었고, 그들은 함께 밤을 보낼 것이었다. 그들이 짓는 웃음은 돈으로 살 수 없었다. 나는 두어 시간 후, 불 꺼진 방에서 릴스를 보다가 피식되며 오답을 맞출 것이었다.


부모 등골 빨아 섹스를 연명하는 대학생은 아름답지도, 부럽지도 않았다. 나이든 미숙아들은 정답의 자격이 없었다. 부모의 경제력 자장에 길들여져 자기 능력에 맞는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지 않는 합리화, 자의식과잉의 오답, 비혼이었다. - 늙은 미숙아의 자학적 고백이다.


외국인 유학생이자 노동자인 이방인들은 지하라고 여겼던 곳에서 별을 캤다. 하늘에서 별을 따려던 나는 오히려 이방인이 되버렸다. 에스컬레이터가 우리를 지상으로 올려 놓았을 때, 파리바게트의 예쁜 케이크, 베스킨라빈슨의 아몬드봉봉, 화원의 꽃다발은 연인들에게는 가까운 자국(自國)이었고, 내게는 무용한 자국(mark)이었다. 나는 한 주가 힘든 물체였다. 내가 돈을 버는 이유는 내 노후, 그뿐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삶의 배터리가 되어 주는 관계, 형상화 된 정답이 기특했다. 선남선녀를 보며 흐뭇하게 웃는 노인들의 심정을 왜 내가 알어버렸는지 나도 알고 싶지 않지만, 대책없이 달달했다. 그들에게서 달디달고 달디달고 달디단 밤양갱이라도 나눠 받은 기분이었다. 바라는 게 오직 서로일 저 낮은 자리의 별들이 오래도록 반짝였으면 좋겠다. 무례하게도, 그렇게 상상하고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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