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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Apr 26. 2024

행복을 기록하는 이유


[쓰레기 읽기2]가 today pick 요즘 뜨는 브런치북 3위에 오른 적 있었다. 캡쳐해둘 만큼 올해 가장 행복한 ‘오!’는 몇 십 초 명멸했다. 기쁨의 여진이 몇 시간 이어지다가 식었다. 하루 종일 싱글벙글할 성취였지만,  20대 때 친구에게 게임 한 판 이겼을 때 기쁨만 못했다. 큰따옴표로도 갈음하기 벅찼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드라마 다음화가 기다려지는 소소한 설렘의 기억도 희미했다. 이날, 내가 고장난 것을 확신했다.


다음날, 나는 ‘행복 파산’을 인정했다. 브런치북 순위가 곤두박질 쳤을 때 상실감은 전날 성취감을 뒤덮고도 남았다. 이런 행복의 산수로는 나는 영원히 행복의 영업 이익을 거둘 수 없었다.


‘내가 그렇지 뭐’만이 심리적 통증을 마비시켰다. 견딜 만한 우울감을 일상화 함으로써 고통을 상쇄하는 것이다. 덕분에 행복하지 않은 것과 별개로, 누구나 달고 사는 월요병이나 가슴 속 사표도 없었다. 노 잼, 노 스트레스, 나는 지루한 천국에 살았다. 엇비슷한 한 주들이 성실하게 반복되었다. 복사기 인쇄물 출력되는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인쇄물 한두 장 누락되어도 상관없었다.


편의점 도시락 시절이 끝나고 내 생에 가장 평안한 시절인데도 2년째, 불면이다. 행복하지 않은 습관에 혐의를 뒀다. 입면 장애는 극복했지만 루나팜이 없으면 중간에 깼다. 한 번 깨면 잠은 고르지 못했다. 약을 안 먹으면 3시간, 먹으면 5시간쯤 잤다. 그나마도 지저분하고 혼탁했다. 적절히 버티다가 한 달에 이틀 정도는 퍼졌다.


불면은 인과응보였다. 행복 호르몬으로 알려진 세로토닌과 옥시토신이 교란될 법한 일상을 누적해 왔다. 멜라토닌을 복용해도 잠은 달라지지 않았으므로 멜라토닌의 전구물질인 세로토닌은 용의선상에서 제외했다가 수면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것은 세로토닌인 것을 알고는 다시 의심 중이다. 옥시토신은 설득력 있었다. 옥시토신은 유대감의 호르몬이고, 나는 1년에 사람과 밥 먹는 횟수가 20회 안팎인 생활을 10년 넘게 이어왔다. 약을 먹지 않을 때 잘게 쪼개는 꿈에 젊은 엄마, 어린 동생, 20여 년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가 나왔다. 무의식에 각인될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외로웠어야 했지만 외롭지 않아서 혼자에 길들여졌다. 길들여진 혼자는 냉소를 너머 혐오를 벼려내기 시작했다. - 인간이 싫다.


우울은 통제 가능한 부정성이었다. 글쓰기로 우울을 길들였다. 글쓰기는 우울증 치료 방법 중 하나이기도 했다.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자신과 마주하며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다. 나는 지나치게 나만 마주하며 우울의 확증파괴 단계로 진입한 듯했다. 처음에는 우울을 배설했지만, 배설 후 사람을 채우지 않아 결국 내 배설물을 내가 먹었다. 글을 쓸수록 내 우울은 논리적으로 타당해져 갔다. 마음의 용종인지 알았는데, 이제는 암으로 봐야 할 듯했다. 쓰레기를 읽다가 세상을 읽는 프레임이 쓰레기가 된 것이다. 나는 기억 자아의 항암 치료가 필요했다.


인간의 자아는 경험 자아와 기억 자아로 이분된다. 경험 자아는 카르페디엠이다. 그 순간의 경험을 즐긴다. 기억 자아는 그 경험을 평가한다. 성취의 기억에서 행복을 이자처럼 받아 먹는다. 사람마다 경험 자아와 기억 자아의 성분비는 다르다. 입시 생활을 거치며 현재를 학살한 경험치가 높은 평균 한국인은 기억 자아의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 나 역시 기억 자아가 우세했다. 나는 꿈을 좇는다며 내 경험 자아를 억압했다. 작가가 될 수 있다면, 연애 따위 아무래도 좋았고, 곰팡이 집에서 살아도 괜찮다는 식이었다. 실현되지 못한 꿈은 열등감과 우울감이 복합된 기억 자아를 형성했고, 기억자아와 경험자아의 경계도 옅어졌다. 하필 성실해, 오답에도 성실했다.


인간은 쾌락보다 고통에 민감하다. 연봉 10% 오를 때의 쾌락과 연봉 10% 삭감 될 때 고통에 별점을 매겨 보면 간단하게 비교된다. 행복의 가성비를 떨어뜨리는 불합리한 인지 시스템 같지만,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야생에서는 고통에 민감해야 살아 남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문명화 되어 사회 안전망 수준이 높아진 지금, 고통 민감성은 비만처럼 거추장스러운 유전자가 되어버렸다. 건강한 몸을 위한 다이어트처럼, 건강한 자아를 위한 고통 민감성의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대한민국, 꽤 괜찮은 나라에서,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고통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만성화 된 우울은 통제 가능했으나 합병증 같은 냉소와 혐오로 직조된 불면은 힘에 부쳤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다. - 살려 주세요.


고통 민감성 자아를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너무 오래 도포되어 나이테가 되어버린 우울은 자아와 거의 구분되지 않았다. 그래서 행복을 기록하고자 했다. 불행을 합성하는 경로에 이물질을 새겨 넣음으로써 불행해지는 습성에 제동을 거는 것이다. 글쓰기는 오랜 습성이니, 이제는 글을 쓰려면 어떤 소재에서도 행복을 읽어내야 했다. 나는 내 의지를 믿지 않지만, 내 글쓰기 습성은 믿는다. 우울을 쓰듯이 행복을 쓴다면, 나는 행복하지 않더라도 행복한 척할 것이다. 뇌는 그다지 정교하지 못해서 웃으면 행복감을 느낀다.


물론, 옥시토신 분비를 위해 사람을 좀 더 만나거나 연애를 하는 것이 확실한 처방이다. 그러나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들 곳 없다. 혐오로 벼려진 가시나무는 상대에게 불편함을 초래할 것을 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민폐일 수 있는 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처방, 행복 기록으로 세상을 보던 내 오래된 프레임 우울에 균열을 가한다. 6시간쯤 푹 자고 싶어서, 살던 대로 사는 게 지긋지긋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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