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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May 03. 2024

봄날의 자전거 맛을 아시나요?

바람에도 맛이 있다. 나는 자전거로 만들어 내는 바람 맛을 가장 좋아한다. 자전거를 탈 때, 바람은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신선함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내는 내 몸맛이다. 온몸의 근섬유들이 보낸 근력이 허벅지에서 팽팽하게 응집되어 페달을 굴리는 속력으로 분출된다. 체인의 힘을 빌어 달리는 속력은 맨몸의 배가 되지만 속력의 중심에 내 근력이 옹골져 있다. 자전거가 달릴 때, wind와 wish는 다르지 않다. 자전거의 바람은 내 가능성의 맛이다.


내 라이딩은 추레했다. 자전거용 쫄쫄이를 입자니 민망하기도 했지만, 자전거에 굳이 최선을 묻히고 싶지 않았다. 낡고 편안한 추리닝에 스카프를 두르고, 벙거지 모자를 쓰고, 목장갑을 끼고 있어서 얼뜨기 인부 같았다. 내 차림새는 자전거와 잘 어울렸다. 자전거는 아무 데나 세워 둬도 훔쳐 가지 않았다. 당근마켓에서 70,000원에 업어온 중고였다. 구매 당일 타이어 안쪽 공기 주머니가 터졌고, 그해 여름 실밥이 노출될 정도로 마모된 타이어 앞뒤를 갈았고, 이듬해 브레이크와 휠도 교체해 수리비가 더 들어간 고물이었다. 그저 달릴 수만 있으면 괜찮았다.


내 라이딩은 목적에 충실했다. 속력의 크기가 아니라 속력의 장악력이 중요했다. 내가 달릴 때, 나는 브레이크를 예비하지 않아서 속력의 순도가 높았다. 금호강 둑을 따라 뻗은 자전거 도로는 시야가 트여 있어서 우글대는 날파리나 방향을 잘못 잡은 풍뎅이 외에는 돌발 변수가 없었고, 평일 낮 중소도시에 자전거 도로를 타는 사람 자체가 드물었다. 주말에 어쩌다 시간이 나도 자전거를 타지 않았다. 득시글한 사람들 때문에 앞뒤 간격을 재며 브레이크도 예비해야 했다. 평일이어야 길이 내 몫이었다. 오직 나를 위한 길을 오직 나만 달리는 한갓짐은 정점에 선 권력의 무료함을 닮았다.


금호강 자전거도로를 탈 때, 대구 방향보다 영천 방향을 선호했다. 영천 쪽이 자전거 밀도도 낮고, 시야도 시원했다. 대구는 강을 따라 아파트가 나란해서 걷는 사람도 많았고 시야도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영천은 강을 따라 논밭이 나란해서 사람이 거의 없었고, 시야도 탁 트였다. 상수원 쪽이라 강이 얕아져 수변 생태도 풍부했다. 꿩, 오리, 왜가리, 황조롱이뿐만 아니라 뱀, 자라, 고라니도 봤다. 보통은 하양교까지만 갔지만 1년에 몇 번씩은 영천교까지 가서 짬뽕을 먹고 왔다. 두 시간 안팎의 자전거를 타는 동안 마주친 사람은 열이 안 될 때도 많았다. 아무도 없는 사막을 횡단하지만 사실은 안전한 한두 시간의 체험은, 사람에 치여 사는 사람들에게 맛 없을 수 없다.


봄/가을은 자전거가 제철이었다. 특히 봄이 맛있었다. 파스텔 톤 초록으로 채색되기 시작하는 계절의 생동감이 강을 따라 잇대져 그늘졌던 마음 밑바닥도 간질간질했다. 봄만큼은 대구 방향도 예뻤다. 지자체가 공터에 채워 넣은 유채꽃은 가장 빠르게 계절의 명도를 높였고, 강둑을 따라 수령이 오래된 벚나무가 꽃터널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벚나무 터널 아래에서는 페달을 거의 굴리지 않았다. 장범준 보컬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잎이~’가 자동 재생되었다. 샴푸향이 느껴진다면 착각이겠지만, 이때만큼은 진위가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계절 무관 선호하는 것은 영천 방향이다. 내게 중요한 것은 브레이크를 예비하지 않아도 되는 속력 그 자체였다.


가끔 장비 풀 장착된 아주머니들에게 따라 잡힐 때도 있었다. 내 부실해진 근력을 한탄했다가 지인의 수 백 만원짜리 자전거를 타보고 오해를 풀었다. 재료공학과 기계공학의 힘은 대단했다. 근력에 실린 약간의 의지를 실용으로 변환하는 마법은 과학적이었다. 욕심이 안 났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구매하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가성비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내게 중요한 것은 운동량과 통제력이었다. 좋은 자전거는 동일 거리 대비 운동량을 떨어뜨렸고, 자전거 성능과 속력의 통제력은 무관했다. 사람이 거의 없는 자전거 도로에서는 브레이크가 없어도 각자가 각자의 속력을 통제할 수 있었다. 선물 받는다고 해도 관리에 정신력이 낭비될 것이 뻔했다. 지금 내 자전거는 원룸 1층 출입구 구석에 자물쇠도 잠그지 않은 채 세워져 있다.


정신력 충전이야말로 자전거를 타는 핵심 이유였다. 자전거를 타는 동안 끝도 없이 멍때릴 수 있었다. 스마트폰 속에서 도파민이 팝콘처럼 터져댈 때, 뇌는 쾌락으로 마비될 뿐 지쳐 갔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더 필사적으로 아무것도 하고 있는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인간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스마트폰과 거리 두기는 쉽지 않았다. 이때 자전거 타기는 온몸으로 때리는 ‘멍-’으로서, 탈진한 채 움직여야 했던 뇌의 숨구멍 기능을 했다.


자전거를 타지 않고서도 멍때릴 수 있지만, 자전거를 타기에 멍때리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페달을 굴리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다 보면, 길고 긴 속력을 따르다 보면, 뭔가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기다림이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가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몸에게 내맡기고 보면, 자연스럽게 멍때려졌다. ‘멍때리다’의 사전적 의미는 아무 생각 없이 있는 것이지만, 도인이 아닌 이상 생각을 완전히 비우기는 불가능했다. 그저 아무 생산성 없는 잡생각, ‘하늘이 파란 색이다, 푸른 하늘 저 멀리 새 희망이 넘실 거리면 미래 손녀 코난은 탐정이 되었을지, 김정일 손녀가 승계하면 쿠데타가 get your crayon, 빅뱅이론이나 다시 볼까.’면 충분했다. 의식의 끈을 놓아버린 자유연상(눈 뜬 채 꾸는 꿈이다)에 절여지고 나면, 한잠 자고 일어난 듯 개운했다. 집에 돌아왔을 때 조금 멀쩡해진 내가, 왔다.


내가 오는 길에 나는 쏠쏠한 선물을 받게 되었다. 멍때리는 중에 이 생각 저 생각 널뛰다 보면, 신의 실수처럼 뜻밖의 것이 생겨났다. 창의성이랬다. 신선한 아이디어나 마음에 드는 문장들이 기습적으로 조합되었다. 신도 지구를 창조할 때 우주적으로 멍때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뭘 써야 할지 모를 때, 자전거를 타면 해결되곤 했다.


이 글을 업로드 한 후, 나는 자전거를 타고 영천교에 갈 것이다. 1년 만인가, 어쩌면 2년 만일지도. 바쁘다는 핑계로 굳이 멀리까지 가지 않았지만, 일기를 미리 써본다. 아직 먹어보지 않은 짬뽕은 여전히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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