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에세이 '25년 3월호 게재 후기
차량 정기검사 통지서가 날아왔다. 언제 또 이렇게 시간이 지났나 싶다. 예약해 둔 시간은 오전 9시였다. 미래의 내가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이렇게 일찍 자동차 검사를 잡아놨나 애꿎은 과거의 나에게 혼자 툴툴거리며 차를 몰고 길을 나섰다.
내 차는 2008년에 출고된 그랜저다. 만 15년이 훌쩍 넘었다. 요즘 국산차 평균 폐차 주기가 15년이 조금 넘는다고 하니, 사람으로 치자면 살 만큼 산(?) 녀석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평균이 그렇다는 거지, 이 친구를 폐차시킬 생각은 아직은 없다.
검사는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삼십 분이나 되었을까. 검사소 직원이 합격이 아니라 ‘합격 유예’를 준다. 아니 왜죠?
“차량 후미등 한쪽이 나갔어요. 후미등이 안 켜지는 건 불합격 사유거든요. 저 쪽에 가서 전구만 교체하고 오시면 다시 검사하고 통과시켜 드릴게요.”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보니 자그마한 수리점이 보인다. 전구와 같은 소모품을 파는 곳인데, 나 같은 차주가 많은지 검사소 한쪽에 상주하면서 고객들을 받고 있었다. 검사소 직원이 건네준 종이를 보여주니, 능숙하게 후미등을 해체하고 내부를 보여준다.
“한쪽 전구가 나갔는데, 어차피 다른 쪽 전구 수명도 다했을 거예요. 두 쪽 다 바꾸시는 게 좋아요. 이왕이면 일반 전구보다 훨씬 오래가는 LED 전구로 바꾸시는 것이 좋아요. 몇 천 원 차이인데, 수명은 두 배 이상 더 길어요.”
능란한 수리점 직원의 세일즈에 그만 홀딱 넘어가 양쪽에 새 LED 전구를 달았다. 사람으로 치자면 팔십을 훌쩍 넘은 그랜저의 뒤꽁무니가 새 생명을 얻은 셈이다. 교체 증명서를 가지고 다시 검사소 직원에게 갔다. 이번에는 다행히 OK다. 서류에 사인을 해주며 직원이 한 마디 덧붙인다.
“전반적으로 큰 문제는 없는데, 배기구 쪽에 녹이 슬긴 했어요. 나중에 정비할 때 참고하셔야 할 것 같아서요.”
어머니를 조수석에 태우고 시장을 가는데, 정기검사를 받았다고 말씀드렸더니 차를 이리저리 두리번거린다.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 콘솔 박스도 괜히 한 번 열어보시곤 묻는다.
“이건… 뭐니?”
“아, 그거 아버지 전화번호네요. 벌써 번호 잊으신 건 아니죠?”
“그러네, 이거 네 아빠 글씨네. 뭔 종이에 쓰신 거라니… 아, 너희 신혼집 주차증이네.”
반으로 접힌 종이 뒷면에는 돌아가신 부친이 써 놓은 전화번호가 있었다. 펴서 앞면을 보니, 신혼 때 살던 아파트 주차증이다. 아들네 집에 와서 잠시 주차해 놓았을 때 연락처를 써서 운전석 창문 앞에 잠시 놓아두었을 그 누런 종이에는, 십 년 전 이맘때 날짜 소인이 또렷이 박혀있다.
은빛 그랜저는 아버지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차였다. 정작 몇 년 타지도 못하고, 투병 중에는 거의 주차장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던 그 차를 당신이 돌아가신 후에 상속받았었다. 떠나신 지도 이제 수년이 지나, 이제 아버지가 남긴 유품이라고는 이 그랜저 하나뿐이다. 이래저래 잔기스는 많지만, 그래도 승차감도 제법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도로를 달리고 있으면 이 차를 타고 전국을 누비던 아버지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아버지와 함께 다녔던 공간과 시간들이 응축되어 있는 셈이다.
살다 보니 그런 사소한 일상의 기억들 하나하나가 점점 더 소중해진다. 사람은 과거를 잊어야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곤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와 함께 했던 좋은 추억들이 점점 잊히고 사라지는 것은 아들로선 그저 아쉽고 서글픈 일이다. 돌아가셨을 때는 그렇게 슬프고 힘겨웠는데, 몇 년 지났다고 그새 점점 아버지 모습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이 종종 믿어지지 않을 때가 많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코코’에서 나오는 것처럼, 아버지 영혼도 나나 동생이 잊는 순간 그만 소멸해버리면 어쩌나.
몇 번의 정기검사를 더 거치게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앞으로도 그랜저는 좀 더 타고 다니게 되지 않을까 싶다. 녹은 좀 슬었지만 아버지와의 추억이란 독특한 튜닝을 거친 차를 떠나보내기엔 아직 내가 마음의 준비가 안된 것 같다. 이 느낌을 다른 차에서 갖는 건 당연히 불가능한 일일 테니까. 새 LED 전구로 업그레이드도 했겠다, 이제는 잘 달릴 일만 남았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잘 부탁한다 내 그랜저.
월간에세이 측에서 브런치를 통해 연락해 온 건 반년쯤 전이었다. 생각보다 진중한 내용의 원고 게재 요청이었다. 브런치를 통해 들어오는 제안 중에는 생각보다 광고 성격의 내용들도 없지 않아서, 처음에는 또 그저 그런 내용이겠거니 했는데, 메일을 읽고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마감기한 내에 내가 써서 보낼 수 있는 최선의 에세이를 써서 드려야겠다 생각했다.
매체의 성격이 다르니 가능한 <썬데이파더스클럽> 뉴스레터에 기고하는 육아 테마의 글들과는 조금은 다른 성격의 내용이 괜찮겠다 싶었다. 회사 생활에서의 단상을 쓸까, 아니면 나이에 관한 이야기를 써 보낼까... 하며 며칠을 보냈다. 그러다 차를 몰고 정기검사를 다녀오던 중, 퍼뜩 이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함께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이 오래된 녀석에 대해. 차에 대한 글이지만 꼭 차에 대한 글이라고만은 할 수 없으니, 월간에세이 독자분들도 잘 읽어주시지 않을까 싶었다.
게재 확정 후 집으로 우송된 오프라인 잡지를 보니 '수필가'로 소개가 되어 있다. 같이 실린 에세이 쓰신 분들을 보니 교수, 화가, 배우, 소설가, 시인, 의사, 변호사... 다들 쟁쟁하신 분들인데 수필가로서 소개되다니 아니 이렇게 황송할 데가요. 첫 책과 두 번째 책 모두 2쇄를 못 찍어서 다음 책은 언제 나올지 기약이 없는데... 말입니다 ㅠㅠ
부끄러움을 뒤로하고 잡지를 쭉 읽어보니 실린 글들 중 좋은 글들이 많다.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동안 느끼는 바들이 진솔하게 담긴 글들이다. 1987년부터 꾸준히 제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는 월간에세이에서 앞으로도 삶 냄새나는 좋은 글들을 더 많은 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길.
#월간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