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1.
쫑알쫑알 싸리 잎에 은구슬이다.
수현이가 부쩍 말이 늘었다. 지치지 않고 입을 놀린다. 말싸움에서 지는 법이 없다. 초등학생이란 다 그런 것인가. 친구들과 교실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그리 하길래 저리도 말솜씨가 좋아졌나 싶다. 아니면 실은 이 모두가 유튜브 때문인가.
여하튼 학교 가는 길 내내 떠들어댄다. 그런데 가는 귀가 먹어가는지 잘 안 들린다. 비가 오는 날이나 늦어서 마음이 급한 날은 더 그렇다.
"아빠! 블라블라"
"응?"
"아빠! 블라블라블라"
"응? 뭐라고?"
"아빠! 아니 그게 이러쿵저러쿵..."
"뭐라고? 잘 안 들려..."
아이가 세 번쯤 불렀을 때야 걸음을 멈추고, 쭈그려 앉아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다. 가만히 앉아서야 아이의 말이 귀에 들린다.
"아빠, 저기 클로버 있잖아, 근데 내가 어제 오다 찾아봤는데 네잎클로버는 없어. 아빠는 네잎클로버 찾아줄 수 있어?"
"글쎄, 아빠가 살면서 네잎클로버는 거의 만난 적이 봤어. 운이 별로 없나 봐."
대개 뭐 이런, 싱거운 이야기들이다. 아이는 학교 가는 길에 다른 것들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이제 겨우 1미터 조금 넘는 키에 눈에 들어오는 것들은 꽃과 풀들이니, 그것들을 아빠의 허리춤에 대고 계속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잠이 덜 깬 채 집에서 나와 머릿속엔 온통 모닝커피 한잔 생각뿐인 아빠는 자꾸만 자기 말을 놓친다.
듣는 이가 두세 번 못 들었으면 짜증을 낼 법도 한데 아이는 다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차근차근 말한다. 눈을 맞추고 조곤조곤 이야기해주는 아이가 그럴 땐 그저 고맙다.
2.
"아빠가 이쪽으론 잘 안 들려..."
아버지는 종종 그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차를 타고 가다 조수석에서 뭐라 뭐라 하면 아버지는 잘 안 들린다고 몇 번이고 다시 말해달라 했다. 가는 귀가 먹어서가 아니라 젊을 때부터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았는데, 자식은 잘 듣지 못하는 아비를 탓했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못 들었던 것은 아니다. 사고 때문이다. 젊었을 적 겪은 사고로 인해 오른쪽 청력이 거의 손실되었던 것. 내내 지독히 불편했을 텐데도 크게 내색하지 않고 삶을 살았다.
나는 이제야 겨우 그와 그의 귀를 생각한다. 땅에 떨어질 때 오른쪽으로 먼저 떨어졌던 것일까. 그 충격이었던 것일까. 수술대에서 깨어나 한쪽 귀가 들리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서른 살 그의 가슴속엔 무슨 생각이 들어차고 있었을까. 자식이 물으면 몇 번이고 다시 되물어야 했던 사오십대 시절을, 그는 어떤 마음을 한 채 지나왔을까.
아버지는 말년에야 장애인 등급 신청을 했다. 자신이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아들은 제 아버지 아팠던 귀가 왼쪽이었는지 오른쪽이었는지도 별 관심이 없었다. 혼자 떠올려보다 말고 옆에 있는 어머니에게 확인차 묻는다. 어머니는 쏘아본다. 자식 낳아봤자 다 소용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든 말이다. (속으론 이 자식이... 이러셨을 수도 있겠다.)
제 잘난 줄만 알고 살던 삶이었다. 먹고살기 바빴다는 건 핑곗거리가 되지 못한다.
무정한 자식이었다.
3.
"아빠, 블라블라"
"뭐라고?"
먼저 자세를 낮춘다. 이번엔 무슨 말하는지 놓치지 말아야지. 아직 나는, 잘 들을 수 있으니까.
"아빠, 저기 피카추 인형 뽑기 하고 싶은데 한 번만 하면 안 돼?"
아이와 같이 인형 뽑기 기계 앞에 서서 인형 뽑기를 한다. 아이는 난생처음이다. 버튼 조작이 영 서툴다. 두세 번 시도하다 잘 안되니 기어코 뒤를 돌아본다.
"아빠, 아빠가 해주면 안 돼?"
나? 마이너스의 손인 나? 난생처음까진 아니지만 해본 지 수십 년은 된 것 같은데? 그래도 어쩌나. 아들이 해달라는데.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조심스럽게 버튼을 꾹 눌렀다.
한 번, 두 번... 신의 가호가 있었는지 마지막 세 번째 시도에서 파란색 인형을 뽑았다.
"우와! 라프라스다! 아빠 최고!"
집에 돌아오는 내내 아이는 묻는다. 그게 그렇게도 궁금한 모양이다.
"아빠, 그런데 어떻게 라프라스 그렇게 잘 뽑을 수 있었어?"
살면서 거의 처음, 경이로운 눈으로 아빠를 바라보는 아들의 눈빛을 느낀다.
"엉, 아빠가 인형은 잘 뽑아. 네잎클로버는 잘 못 찾지만."
역시, 잘 들어야 한다. 눈높이를 맞추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