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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민 Aug 30. 2020

딱 그만큼의 안정감

아이 보며 애니 보기 1 - 마녀 배달부 키키(1989)

지난해부터 넷플릭스를 통해 20여 편에 달하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코로나 시대의 행운이었다. 사상 초유의 입학 지연 사태로 인해 아이가 등교 자체를 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지브리까지 없었다면... 아이고야. 


예상치 못한 위기 속에서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나름 '대안학교'의 역할을 충실히 해 냈다. 기존에 보아 왔던 영상들과는 사뭇 다른 컬러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이었기 때문에 두 아이 모두 꽤나 흥미롭게 이 여정에 참여했다. 어쩌면 지브리가 애니메이션을 통해 보여준 이야기의 풍광이 정부에서 시청하라고 한 EBS보다 더 교육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이야 별생각 없이 봤겠지만. 


물론 아이들이 전편을 다 섭렵한 것은 아니다. 최근의 애니메이션 시청 경력으로 치면 이 꼬마 관객들이 나보다 몇 수 위다. 게다가 다른 곳도 아니고 우리 집 안방이다. 초반부터 주의를 확 잡아끌지 못하면 천하의 미야자키 하야오 할배도 별 수 없다. 그런 이유로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와 '추억은 방울방울', '고양이의 보은'은 결국 끝내 정주행에 실패. 


재밌는 건, 아들과 딸의 관람 성향이 묘하게 나뉜다는 것이다. 아들이 좋아하는 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 딸이 좋아하는 건 <마녀 배달부 키키>와 <마루 밑 아리에티>이다. 기준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제각기 자신이 몰입할 수 있는 캐릭터가 다르니 그런 것일까...? 그저 옆에서 곁눈질하며 짐작할 뿐. 


아이들이 좋아하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은 반복 강제 재방송 목록이란 영광의(?) 자리에 오른다. 마녀 배달부 키키도 덕분에 꽤나 자주 집에 놀러 왔다. 영화를 보고 나면 둘째는 언제나 집에 있는 온갖 기다란 막대기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나는 시늉을 한다. '아빠, 나 키키 같지?' 하는 그 모습은 뭐.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이 땅의 모든 딸바보들이여, 그대들은 바보가 아니다!)  




부모 속 알 길 없는 열세 살 키키는 새로운 마을에 정착,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며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세상 모든 주인공에겐 다 고난이 따르는 법. 키키도 갑자기 마법 능력이 약해져 하늘을 날 수 없게 되는 상황에 처한다. 마법이라곤 '하늘을 나는 법' 밖에 모르는데, 하늘을 나는 법을 잃어버리면 키키는 생업인 '우편 및 소포 배달'을 할 수 없게 된다. 시쳇말로 타지에서 굶어 죽게 생겼다는 이야기다. 


어릴 때부터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날 수 있었던 키키는 갑자기 날지 못하는 자신과 마주한다. 잔뜩 힘을 준 채 '날아야지' 하고 의식하는 순간 어깨에 힘이 들어가 고꾸라지기 일쑤다. 무리해서 날려다 하나밖에 없는 자산인 빗자루마저 부러진다. 보는 사람마저 애처로운 순간이다. (잔인한 미야자키 감독 같으니라고!)


키키가 다시 날 수 있게 되는 데는 화가 친구 우르술라의 격려가 큰 역할을 한다. 먼저 어른이 된 우르술라는 자기도 그림이 잘 안 그려질 땐 '미친 듯이 계속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거나', '그림 그리기를 관두고 다른 것들을 하며 다시 그림이 그리고 싶어 질 때까지 기다리거나' 한다며 키키가 마음을 다잡도록 조언해준다. 그리고 키키는 어려움에 빠진 또 다른 친구 톰보를 돕는 과정에서 결국 다시 날 수 있게 된다. 



<마녀 배달부 키키>는 고난을 극복하며 어른이 되는 어린 소녀의 성장 스토리이다. 하지만 열세 살 시절을 오래전에 훌쩍 넘어 버린 어른들도 살면서 거듭 비슷한 경험을 한다. 자전거 타기처럼 배우고 나면 몸에 각인되어 잊히지 않을 것만 같던 능력들조차도 어느 날 갑자기 몸속에서 마법처럼 사라져 버리는 경험, 다들 한 번쯤은 있지 않은가? 늘 쓰던 워드와 엑셀과 파워포인트의 텅 빈 화면에 무얼 채워 넣어야 하나 그저 막막하던 기억. 꽤나 오래 해온 일인데도 초보처럼 허둥지둥 우왕좌왕 실수 연발이라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때의 기억. 아니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는데 이것도 못하면 어쩌나...? 싶던 그 순간들. 날지 못하는 키키가 날려고 애를 쓸 때, 몇 개의 지나간 기억들이 가슴에 내리 꽂혔다. 키키가 힘차게 다시 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비례하여 커졌다.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 


키키는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날게 되었고,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잘 끝나려는 순간, 키키 아버지는 우체부에게 키키의 편지를 전달받고 부리나케 집안으로 뛰어들어오며 "여보, 키키한테 편지 왔어!"라고 소리친다. 그제야 나는 안다. 키키에게는 고향에서 연락을 기다리는 부모라는, 자기도 깨닫지 못하고 있던 자산이 있었구나. 


반복해서 본다는 게 이럴 때 좋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영화를 본다. 


마녀는 열세 살이 되면 부모를 떠나 다른 마을에 가서 수행을 해야 한다는 설정이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키키가 갑작스레 부모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해맑게 이별 통보를 하는 장면을 빠르게 내보낸다. 그 당찬 목소리의 이별 통보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멈칫 멈칫했다. 이건 감독이 나빴다. 아니 왜 멀쩡한 애를 부모랑 생이별을 시키나? 고작 열세 살인데?!


딸과 함께 캠핑할 준비에 들떠있던 아빠는 갑작스레 어린 딸의 이별 통보를 받는다. 황망함도 잠시, 아빠는 아끼던 라디오를 선물로 건네주고, 아이가 어릴 때처럼. 아직 덜 무거울 때처럼 비행기를 태워주며 한 마디 건넨다. 


우리 예쁜 딸이 어느새 이렇게 컸구나. 생각대로 안되거든 언제든 돌아오너라.


키키 아빠의 솔직한 심정은, 뒷 문장에 더 담겨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한 마디가 우르술라와 톰보에 이어 키키를 다시 날 수 있게 한 마지막 열쇠가 아니었을지. 잘 안돼도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설사 날지 못하는 키키가 되더라도, 엄마 아빠로부터 사랑받는 소중한 딸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으니까. 



젊은 혈기를 주체 못 하고 거실을 뛰어다니며 우당탕탕 난리 치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아이들이 다 커서 이곳을 떠날 때까지 나는 그만한 안정감을 심어줄 수 있을까? 어른이 되어 세상에 나가 때론 좌절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뭐, 정 못 날겠으면 집에 가면 되니까' 하며 힘 빼고 다시 도전할 수 있을 정도의 마음, 딱 그만큼의 따뜻함을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자산으로 남겨줄 수 있을까 생각한다. 


'생각대로 안되면 언제라도 돌아오라'라고 등 두드려주는 아빠가 되는 것, 아무리 상상해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마녀 배달부 키키> (1989,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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