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올해 한국나이 열 살, 만 9세가 되었다. 나는 임신 기간까지 합쳐 당당히 엄마나이 열 살이 되었다.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 내가 십 년 동안이나 실패하지 않고 엄마로 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는데 뒤돌아보니 세월이 무사히 지나있다. 무척이나 나이 들고 싶었다. 내가 늙어도 좋으니 아이들이 어서 훌쩍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연년생 남매를 길렀다. 오늘은 그 정점을 찍은 날이라 기록을 시작한다.
나는 말이 좋아 자연주의, 최소주의 육아중이지 금욕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아이에게 풍족함보다는 부족함이 미덕이라고 가르치는 조금 특별한 엄마이다. 내가 명품백에 관심이 없는 것을 아이에게 그대로 투영해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장난감을 갖는 것은 쓰레기를 늘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아이는 레고가 갖고 싶다고 말하다가도 스스로 필요 없다고 말한다. 나는 아이를 그렇게 가르쳐왔다. 열 살 생일을 맞은 큰 아이는 얼마 전부터 생일 선물로 뭘 갖고 싶냐는 대화를 나누다가 결론을 이렇게 내렸었다. 생일 선물 필요 없어요. 전부 쓰레기가 될 거니까요. 대신 양념 치킨 두 마리하고, 온 식구가 부루마블 게임하는 걸로 생일 선물 할게요. 그 소박한 생일 선물 중 한 가지를 이 아둔한 엄마는 잊어버린 것이다.
부루마블 게임은 주말에 아빠랑 넷이서 하기로 했으니 문제될 것이 없는데 양념치킨이 문제였다. 나는 분명히 생일 전날인 어제, 퇴근길에 사오겠노라고 약속을 했건만 정작 오늘은 새카맣게 잊어버리곤 저녁에 생일 케익만 예쁜 걸로 하나 사서 들어갔다. 집에 아이가 좋아하는 고기가 있으니 구워주면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고기를 다 먹었을 때쯤 전화가 울렸다. 외할아버지 할머니가 생일 축하한다는 말씀을 하시며 몇 가지 질문을 하셨다.
생일 선물 받았니?
학교에서 친구들이 축하한다고 말했니?
아들은 이 두 질문에 “아니오”라고 대답을 하고나서 갑자기 우울해지더니 오열하기 시작했다. 엄마 양념치킨이 없잖아. 오늘 학교에서 아무도 내 생일 축하한다고 말 안 했어. 엄마도 생일 선물 안 줬잖아. 처음엔 방어할 생각이었다. 결국 물건으로 된 선물을 사 봤자 나중에 가지고 놀지도 않고 집에 여기저기 처박혀 정리하기만 힘들어진다고. 그러다가 생각을 바꿨다. 아니 저절로 바뀌었다. 내 품으로 파고들며 열 살이 된 남자 아이가 오열하는 모습을 보자 진심으로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양념치킨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퇴근한 것이 몹시 미안했다.
그 약속이라도 꼭 지켰어야 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약속이라도 지켰어야 했는데. 올 봄은 온 식구가 돌아가며 아픈 날이 대부분이었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팠고, 아이들도 번갈아 아팠으며, 그들이 아플 때 내가 대신 아파져도 좋으니 아이가 얼른 나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간호했는데, 마지막으로 내가 아팠다. 감기가 무슨 대수냐고 여길 수도 있지만 ‘인후염’으로 병가를 썼다가 아이의 독감으로 ‘자녀돌봄휴가’를 쓰고 다시 아프다는 이유로 회사에 빠지기가 죄스러울만큼 건강관리가 어려웠던 시즌이다. 병원에서 양쪽 콧구멍을 쑤시며 코로나와 독감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지만 감기약을 먹고 깜빡깜빡 하는 정신을 겨우 챙겨가며 업무에 구멍을 내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내 인생에 제일 중요한 것에서 구멍을 내고 만 것이다. 아들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들과 부둥켜안고 양념치킨을 못 사줘서 정말 미안하다고. 내일 꼭 사주겠다고 오열하는 나를 조용히 보던 딸은 옆에서 자기도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셋이 겨우 마음을 추슬러 저녁 먹은 것을 치우고 남매가 자는 이불 사이에 누워 아이들을 재우던 중에 두 번째 일이 터졌다. 아들은 나를 닮아 어수룩하고 제가 가지고 싶은 것에 대해 말을 잘 못하는 면이 있다. 단짝 친구가 자기 생일이라면서 콕 집어서 무슨 선물을 달라고 말했을 때 나에게 쿠팡에서 주문해달라고 했으면서, 정작 아들의 생일이 되어 그 친구에게 이야기했냐고 물어보니 선물 같은 거 안 받아도 된다고 쿨하게 넘어갔으면서 정작 생일 당일밤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생각할수록 서러웠던 모양이다.
단짝 친구 두 명이 모두 가정체험학습 중이라면서 학교에 오지 않았다고 했다. 여태껏 친구를 초대해서 생일 파티를 해준 적이 없는 내가 아이의 부모로서 너무 소홀했던 건 아닌지 내일이라도 당장 친구를 초대해서 파티를 열어야 하는지 고민되었다. 그러고 있는데 뒤에서 갑자기 딸이 찢어지게 오열하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감정이 슬슬 올라오고 있었던 모양인지 갑자기 대성통곡을 했다. 뭐라고 말을 하면서 우는데 나는 못 알아들었다. 아이가 뭐라고 하는지. 첫째가 통역해주었다.
“엄마 손이 너무 말라서 그게 슬프대요.”
최근에 살이 쪄서 나는 하체 비만이 되어가고 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 중 솔직한 부류들은 ‘00이 요즘 살이 조금 쪘네“라고 할 정도로. 그럼 나는 농담으로 ”하뚱이야“라고 했는데 딸은 유독 몸 중에서 가장 가는 부분인 손가락과 손목에서 그만 엄마의 희생을 발견했나보다. 우리가 엄마를 고생시켜서 그래요. 우리가 엄마 말을 안들어서 엄마가 아픈 거에요. 그 말을 하면서 아이는 그치지 않는 눈물을 쏟아내며 온몸에 힘을 주며 울었다. 나도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주 월요일은 입사한 지 만 17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정확히 그날부터 감기 기운이 올라왔고 아픈 몸을 이끌고 유난히 빽빽하게 잡힌 회의를 주관하면서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책임감을 느끼며 여러 부서와 조율하는 일을 하면서 내가 꺼내서 쓸 수 있는 에너지 이상을 쓰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아이들 돌보는 것에도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온전한 자유시간을 누리지 못한다는 좌절감, 몸이 아픔에서 오는 무력감, 유독 티격대는 남매를 보며 엄마 노릇하기 힘들다는 고통을 절절히 느꼈다. 나의 눈빛과 한숨, 말투와 탄식 사이에서 나의 불만이 고스란히 아이들의 마음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엄마가 아픈데 왜 이렇게 싸우는거야! 참지 못하고 내뱉은 말에서는 짜증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현실을 이겨내보겠다고 꿈을 가지며 살아가는 중이다. 소설쓰기 심화반에 등록해서 입문반에서 가지던 열정을 이어갈 예정이고, 이 주 후에는 외부 강의도 예정되어 있다. 업무는 점점 중요한 단계로 접어들고 있고, 만 20년을 채워 퇴사하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가동 중이다. 이제부터 3년 남았다. 3년을 더 아이들의 초등 생활과 나의 회사 생활을 이어가야 할 텐데 그게 몹시 막막하던 중이었다.
소설을 잘 쓰는 것도 아니고, 엄청 유명해서 강의 섭외가 물밀듯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이런 부차적인 일들이 결국 내 평온한 삶에 균열을 내는 불온한 꿈들인가 싶어서 마음이 괴로웠다. 계절이 바뀌며 감기에 여러 번 걸리는 것만으로도 허약체질을 증명하는 것 같아 그것마저 속상했다. 겨울보다 더 춥게 느껴지는 봄을 보내는 중이다. 겨우 한 명씩 떼어내어 토닥토닥 재우자 각각 오열하던 아이 둘은 금새 꿈나라로 들어갔다. 나도 같이 일찌감치 잠이 들었다가 새벽에 깨어났다.
엄마가 된 10주년을 이렇게 맞게 될 줄은 몰랐다. 축포가 터질 줄 알았고 자식을 번듯하게 키우는 일이 쉬운 줄 알았다. 내가 부모에게 못 받은 것을 마흔이 지나서도 끌어안고 있는 것을 상기하며 나는 그런 부모가 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부모에게 감사했던 것보다 미웠던 것, 속상했던 것, 나에게 섭섭케 했던 것들 위주로 아주 꼭 움켜쥐며 살아왔고 소설의 소재로도 깊이 깊이 생각하며 살았다. 용서했다고 생각했던 일도 어떤 날은 스믈스믈 그 기억이 떠올라 혼자 조용히 오열하거나 한탄하며 보낸 날도 꽤 있다. 이건 전부 어릴 때 부모님 탓이야 라는 생각으로부터 지금도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내가 엄마 나이 열 살이 되어보니 부모는 그런 존재이다. 그냥 모자람 투성이. 제 인생 살기만으로도 벅찬 존재. 자기도 아직 어엿한 어른이 아니면서 자식을 키운다고 그저 최선을 다하지만 못난 존재가 부모다. 부모는 신이 아니고, 부모는 모든 것에서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도리어 인간으로서의 부덕함을 자식을 통해서 가장 먼저 발견하는 나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일 뿐이다.
그럼에도 부모가 위대한 것은 그 모든 것을 인정하고 수긍하고 감싸안으며 평생을 살아간다는 점에 있다. 한 번 낳아놓은 자식을 평생 수용하고 보듬으며 산다는 것은 인간을 한 차원 숭고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나 혼자였더라면 나는 이렇게 섧은 생각을 하며 이 한 밤중에 오열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의 부족함에 이렇게 몸이 흔들리게 울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자식이 마음 아파하는 것을 보며 내 육아관, 부모관, 가치관이 혹시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진 않았는지 살펴보고 고칠 점은 무엇인지를 되짚어본다. 부모라면 마땅히 그래야하니까. 우리 부모님도 그런 마음으로 나를 키우셨을테니까. (비록 나는 모르고 자라왔지만. 이제서야 어렴풋이 추측이라도 하게 되었지만.)
내가 가장 행복한 때는 언제냐면 아이들이 목욕을 깨끗하게 하고 음식을 복스럽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 둘이 실컷 놀고 일찌감치 자러 들어가서 오늘 하루 행복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보는 때이다. 내가 강의를 잘 하고 와서 좋은 후기를 받는 것, 책이 출간되는 기쁨, 독자가 반겨주는 행복도 좋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내가 있는 자리, 나의 가정이 평온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그 귀한 것을 오늘 깊이 느꼈다. 요즘 자주 생각하는 화두는 ‘가정 교육’이다. 우리 어릴 때만 해도 가정 교육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요즘은 그런 말을 듣기가 힘들다.
나는 어떤 가정 교육을 아이들에게 하고 있는가?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인생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이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시대에도 필요한 것일까?
아마도 나의 아들과 딸은 그들 자신이 우선으로 가져야 할 가치에 대해 나와의 대화, 가정 내에서의 생활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나갈 것이다. 한 번씩 아이들이 내 뒷모습을 보며 자란다고 생각하면 나는 팔뚝에 소름이 돋으며 부끄러운 점이 떠올라 마음이 서늘해진다. 그럼에도 나는 씩씩하게 새로운 하루를 살고 아이들 앞에서 부족함을 드러내면서도 최선을 다해 사는 엄마로 지낼 것이다. 내 자리를 지키는 것, 나의 모든 것을 나누어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나는 엄마 노릇을 하고 있다고 가정 교육 중이라고 생각하련다.
엄마 나이 열 살,
엄마 된 지 십 주년이 된 것을 축하해.
아이를 키우며 산다는 것은 이렇게 나를 온통 뒤흔드는 질문과 만나는 일이구나.
이 질문의 끝에 나만의 대답을 갖게 되었을때쯤 나는 할머니가 되어있겠지.
그날 웃으며 담백하고 현명한 대답을 하는 꼬부랑 할매가 되어있길 바라.
지금은 서툰게 너무 많아서 그냥 아이들하고 같이 크는 중이라는 걸 인정하자.
수고했어 지난 십 년간.
앞으로 십 년도 또 새롭게 나아가보자. 아이들과 남편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