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준비가 한창이다. 자매였던 나는 동생과 방을 함께 쓰던 것이 어색하지 않았지만 우리집 남매는 몸도 마음도 성장하면서 점점 각자에게 하나씩 방을 줘야겠구나 싶은 순간이 보인다. 어릴 때 관사 생활을 했던 나는 이사 가는 곳마다 주어진 평수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에 익숙했다. 대부분 작은 집이었고 그 크기에 불만을 가지지도 않았다. 집은 원래 이렇구나 하며 살았다. 신혼 생활을 시작하면서도 집 크기에 연연하지 않았다. 우리 형편에 맞게 작은 집부터 시작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열 살 가량이 되자 그 한계선에 부딪혔다. 화장실도 하나 더 필요하고, 네 식구가 여유롭게 살 넓은 집이 필요하다는 걸 차차 실감했다. 맞벌이 하고 있는 우리 부부는 이제서야 영혼을 끌어모아 넓은 집으로 이사가기로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이사가려는 집은 현재 집의 두 배 크기이다. 집 보러 갔다가 거실이 운동장인 줄 알았다. 아들은 여기에서 야구를 해야겠다고 표현했다. 작은 집에 꼭 맞춰 살아가던 우리 식구는 공간쇼크에 가까운 이사를 준비 중이다.
집 계약을 하고 잔금일을 설정한 후엔 이사 업체를 선택했고, 아이들 방에 놓아줄 가구를 고심해서 골랐다. 나무 등급을 꼼꼼히 따졌고 생활 동선을 따져가며 가구 배치에 골몰했다. 책상세트, 침대 프레임, 매트리스, 책상 스탠드까지 지금 내 형편에서 할 수 있는 제일 좋은 것으로 골랐다. 이게 부모의 마음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우리 부모님이 내게 옥색 책상 세트를 사주셨을 그 마음을 이제야 제대로 안 것이다. 나는 좋은 거 못해도 자식에겐 제일 좋은 걸 주고 싶은 마음.
나를 꼭 닮은 아들은 이사 과정에서 나와 남편이 나누는 대화를 놓치지 않고 모두 참견 중이다. 전세가 무슨 뜻이냐, 계약금은 뭐고 잔금은 무엇이냐, 가구 배치는 어떻게 할 것이며, 이사갈 집 현관문은 무슨 색깔이냐, 집 전체 평수와 자기방 평수는 어떻게 되느냐까지. 호기심 박사의 질문에 대답하다보면 기운이 딸리지만 어린 시절의 나와 똑같은 그의 모습을 보며 가슴 뭉클함을 느낀다. 날 닮은 아들을 낳고, 남편을 닮은 딸을 낳아 기르고 집을 넓혀가는 이 과정이 힘들지만 퍽 행복하다.
이전에 살던 사람이 이사 나간 후 빈집일 때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집을 보여줬다. 아들과 딸은 현관문부터 탄성을 질렀다. 이게 말로만 듣던 ‘전실’이냐면서, 이제 우리집도 전실이 있는 거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이 자리엔 자전거 두 대를 놓으면 된다고 열을 올렸다. 이미 몇 달전부터 집 도면을 출력해서 그 자리에 자전거를 그려두었던 참이다. 자기의 삐뚤빼뚤한 연필선으로 그리면 안 된다고, 엄마가 참하게 자전거 그려넣으라고 하던 아들이 현관부터 잔뜩 흥분돼 보였다. 넓직한 신발장 앞에 서서는 어느 지점이 신발을 벗는 곳인지 또 망설였다. 뭐든지 당당한 딸이 여기부터 벗으면 된다고 손수 보여주었다. 아직 이삿짐 나르기 전이니까 신발 신고 들어가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집구경에도 아이들의 성격이 나오는 걸 보니 재미있었다.
현관 중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란히 붙은 남매의 방을 보자마자 아이들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면서 여긴 “100평 고급 호텔”이라고 했다. 곧 인테리어 공사를 앞두고 이삿짐을 모두 뺀, 어쩌면 폐허 같아 보이는 그집을 보고도 아이들은 몹시 좋아했다. 여기를 호텔이라고, 그것도 고급 호텔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니 실제로 고급 호텔에 데려가본 적이 없음이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가끔 국내 여행을 다니며 가봤던 리조트나 호텔의 모습도 최고급이 아니었기에, 아이들은 처음 본 이사갈 집의 모습에 “100평 고급 호텔”이라는 별명을 붙여줄 수 있었다. 짠하고 찡했다.
앞으로 보름 간 공사를 할 것이고 그 후엔 이사를 앞두고 있다. 아직도 신경쓸 것이 많고 그로 인해 새벽마다 저절로 눈이 떠지고 있다. 열심히 읽던 책도 잠시 내려놓았고, 열성적으로 쓰던 글도 잠시 멈췄다. 회사 일과 꼭 필요한 가정 일 외에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눈 아래가 떨리고 거울 속 내 모습은 살이 빠져있다. 어차피 지나갈 시간이기에 이 과정을 즐겨보려고 한다.
이사 견적을 받을 때에도 이삿짐 센터 실장님과 나, 아이 둘이 한 테이블에 앉아서 상담을 했다. 나에게 이사와 관련해서 백 가지 질문을 하는 아이들은 기어코 엄마의 은행 어플에서 우리집 재산이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까지 확인한다. 이번에 매매와 전세의 개념도 설명해주었고, 엄마와 아빠가 한 달에 얼마를 버는 지도 알려주었다. 그렇게 내가 매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에서 하루에 얼마를 버는지, 한 달과 일 년은 얼마의 노동 가치를 가지는 지까지 말해주고 나니 보다 넓고 쾌적한 집으로 가려면 직장을 포기할 수 없음을 가슴 저릿하게 느꼈다.
회사 복직 후 어느덧 1년 반이 훌쩍 지났다. 복직 후 3개월 째는 퇴사 열병을 앓았고, 지난 한 해는 업무와 글쓰기에 열중한다고 빠르게 보냈다. 그이전 휴직기간이 생각나지 않을만큼 나는 직장인이 되어버렸다. 외부 강의도 정리했고, 뭐 재미있는 거 있나 기웃거리던 모든 일도 그만두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직장인으로 완벽히 변신한 것이다. 방황을 끝내고 보니 내겐 흔들림 없이 이어나갈 적금 계좌와 일 년에 몇 일 주어진 휴가 일수가 전부다. 그 외에는 예외없이 흘러가야 할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 다행히 그속에서 꽤 많은 행복을 찾아냈다. 점심시간의 운동, 틈틈이 하고 있는 펜 드로잉, 아이들과 함께 책 읽고 수학 가르쳐주기 등등.
워킹맘의 행복찾기는 이렇게 현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아갈 것이고, 이사도 무사히 진행할 것이다. 앞으로 2주간은 퇴근 후에 매일 이사할 집의 모습이 어떻게 바뀌어가는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마음과 몸의 컨디션을 좋게 유지하면서 100평 고급 호텔로 이사가게 됨을 감사해하며,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가고 있음에 최고의 행복을 느끼며 나는 또 살아갈 것이다. 그 호텔에서는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들어가면 마음 편안해지는 집으로 꾸밀 생각에 행복한 요즘을 보내고 있다. 이 행복은 여럿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내가 힘들 때 기운을 북돋아주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감사함을 느끼며 아침해를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