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내 눈에만 보인다고?
룰루랄라. 회사에 다니면서 공식적으로 힐링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사내 교육을 받을 때이다. 매일 전화와 이메일에 치여서 살다가 한적한 곳에 있는 교육원으로 출근할 때부터 이미 마음속에선 휘파람이 분다. 사내 강사로 활동하기 위해서 받는 강사 양성 교육이다. 내가 가진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는 일, 그걸 기초부터 배울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신나는가? 들뜬 마음으로 강의장에 들어선다.
닭장 같이 빽빽한 사무실 책상이 아니라 경치 좋은 창밖 풍경을 배경 삼아서 강의실 한편에 자리를 잡는다. 어떤 교육을 받게 되려나? 남 앞에 서서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덜덜 떨리는데, 내가 강사가 될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설레는 호기심이 자꾸만 피어오른다. 관심 있는 분야라서 그런지 언제 강의가 시작될지 자꾸만 시계를 쳐다보며 기다리게 된다. 드디어 강사님이 들어오셨다. 초보 강사를 키워내는 베테랑 강사님. 오늘은 어떤 교육이 시작될까?
강의가 시작되었다. 어! 그런데 이상하다. 우물우물 거리는 말투가 영 프로답지 않다. 어떻게 된 거지? 속으로만 갸웃거리고 있는데 알고 보니 충격 요법이다. 앞으로 우리가 첫 강의를 할 때 절대로 이렇게 자신감 없는 모습으로 웅얼거려선 안 된다는 걸 예시로 보여준 거였다. 그리곤 본격적으로 강의가 시작되었다. 정신이 번쩍 든다. 하지 말아야 할 모습을 먼저 보여주시다니.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자신감 있게!'라고 노트에 메모한다.
다음은 강의안을 띄워놓고 시범을 보여주셨다. 강의 예시를 보여줄 테니 잘못된 부분을 찾아서 모두 메모해 보라고 하셨다. 첫 번째 슬라이드가 시작되었다. 강의 제목 아래에 날짜가 적혀있다. 그런데 첫 장부터 오타가 있다. 전부 메모하라고 했으니 노트에 적어둔다. 목차와 강사 소개 페이지에도 오타가 있다. 이상하네. 한 페이지에 적어도 하나씩은 이상한 게 있나 보다. 그렇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오타는 넘쳐났고 그걸 모두 메모해 두었다.
강의장엔 나를 포함해서 수강생이 약 20명 정도 있었다. 전부 사내 강사를 꿈꾸며 강사 양성 교육을 받는 중이다. 지금은 다 같이 교육받는 초보 수준이지만 앞으론 당당히 강의를 이끌어갈 예비 강사들이다. 그 스무 명이 시범 강의에서 이상한 부분을 메모하고 자기가 적어둔 부분을 공유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하나씩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강사가 서 있는 자세, 슬라이드를 넘길 때 포인터 사용이 능숙하지 않았던 것 등등 관찰하면서 어색했던 부분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강의안이 띄워진 화면에 오타가 있었다는 걸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다. 내가 손을 들고 발표했다. 몇 페이지에 어떤 내용이 잘못 적혀 있었는지. 날짜, 숫자, 내용... 내 눈에 보였던 걸 말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오타들이 내 눈에만 보였던 것이다. 그 교육 자료를 준비했던 강사님과 나, 이렇게 둘에게만 보였던 오타들. 그때 느꼈다. 아, 내가 예민한가 봐. 작은 거 하나도 그냥 넘어가지지가 않네. 나는 그냥 평범하게 쳐다만 봐도 보이는 게 다른 사람들 눈에는 특별하게 보이지 않는가 보다.
그동안 작은 것도 그냥 넘기질 못하고 눈에 거슬려했던 날들도 함께 지나갔다. 타인은 모두 편안한 감정 상태인데 나만 자꾸 어떤 것에 시선이 꽂혀서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던 일들, 풍경들에 이런 이유가 있었구나 싶었다.
그날의 깨달음 이후 몇 번의 교육과 실습을 거쳐서 정말로 강사가 되었다. 당연히 강의 준비를 하는데 남들보다 시간이 몇 배로 많이 걸렸다. 남의 강의자료에서 오타를 발견하던 그 눈을 내 강의 자료 만드는 데에도 똑같이 반짝이다 보니 당최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다음 장으로 넘기는 걸 자연스럽게 하고 싶어서 수없이 연습했고 어색한 부분을 메만져나가다 보니 어떤 때엔 1시간짜리 강의에 수백 장의 슬라이드가 만들어지곤 했다. 과한 걸 알았지만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고 좋은 강의를 만들고 싶은 욕심에 멈출 수가 없었다.
이제는 강사 경력도 어느덧 5년이나 쌓였다. 화면에서 오타가 돋을새김 한 것처럼 선명하게 보이던 그 실습생 시절의 새내기는 점점 베테랑이 되고 싶어서 시간과 노력을 효율적으로 쓰는 법을 익혀나가고 있다. 예민함은 조금만 내려놓고 대신 담대함을 쌓고 싶어서 매번 강의할 때마다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 열정의 원천은 어디일까? 나의 예민함 덕분 아닐까?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보다 더 자세하게 예민하게 깊이 있게 볼 수 있다는 것이 싫은 때도 많았지만 점점 이 선명한 눈을 잘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다. 강의 중에 조용히 눈가를 닦으며 마음을 추스르는 청중을 발견하곤 나도 한 박자를 쉬고 그를 향해 내 목소리를 조절해보기도 한다. 그렇게 강사의 예민함은 어떤 경우일지라도 다 써먹을 곳이 있다고 여기며 씩씩하게 경력을 이어간다.
(원고지 14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