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혹시 내일 시간 괜찮으면, 아침 일찍 나랑 등산 가지 않을래?"
전날 밤 퇴근하고 돌아온 크리스틴이 내일 오전에 함께 등산 가자고 제안을 해왔다. 여행을 하면서 꽤 많은 에어비앤비 호스트를 만났지만 크리스틴만큼이나 친절하고 적극적인 호스트는 드물었다. 흔한 게스트하우스나 호텔을 이용하는 대신에 에어비앤비를 선택할 때에는 그들과 함께 머물면서 그들의 삶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는 특별한 경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그저 숙박업으로만 생각하는 일부 호스트들의 태도나 문화와 언어의 차이로 인해 쉽사리 가까워지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무엇보다도 적극적이지 못했던 나의 성격도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케이프타운에서 만난 크리스틴은 빈방에 머무는 손님이 아닌 새로 만난 친구처럼 대해 주었다.
이른 아침부터 아침 식사도 거른 채 크리스틴의 작은 차를 함께 타고 '라이온 헤드'라고 불리는 거대한 바위산 아래로 이동했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운동을 나온 사람들이 꽤 많았다. 간단히 간식을 먹고 원뿔 모양의 바위산을 나선형으로 돌며 오르기 시작했다. 차분하게 내려앉은 아침의 찬 공기를 거친 날숨으로 데워가며 한참을 올라간 라이온 헤드는 케이프타운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바위 언덕이었다. 이른 아침의 쨍한 날씨 덕분에 선명하게 보이는 수평선과 도시를 품어 안고 있는 듯한 케이프타운의 전경. 약간 식상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던 눈부시게 멋진 풍경이라는 말이 바로 이런 광경을 위한 수식어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침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와 도시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크리스틴은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 우리 부부에게 도시의 이곳저곳을 소개해 주었다.
"저기 고층 빌딩이 많이 보이는 곳이 도심이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지는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시 외곽에 살며 출퇴근하지. 저기 테이블 마운틴 건너편에 바다가 보이는 Camp bay, Hout bay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많이 살아. 그리고 저 멀리 뿌옇게 보이는 평지에는 타운쉽이라는 흑인 집단 거주지역이 있어.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지만 전혀 다른 세상이지. 아파르트헤이트가 사라진 지 오래되었어도 흑인과 백인 사이는 여전히 테이블 마운틴만큼이나 큰 벽이 있는 것 같아."
독일에서 이민 오신 부모님의 외동딸로 자란 크리스틴은 집값이 비싼 편인 케이프타운 시내에서도 손꼽히는 지역에 살며 좋은 직업도 가지고 있기에 삶에 대한 큰 불만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케이프타운을 내려다보며 담담한 어조로 인종에 따른 극심한 양극화 문제와 그로 인한 범죄에 대해 불만을 토하며 영국으로 이민을 생각 중이라고 했다. 크리스틴뿐 아니라 남아공의 많은 젊은이들이 유럽에 취직하는 것을 꿈꾼다고 말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환경에 사는 그들은 항상 밝고 걱정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크리스틴을 통해 일부만 보고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의 단순한 생각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다음날, 케이프타운에 가면 제일 먼저 가봐야지 했으나 계속 미뤄왔던 테이블 마운틴을 가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케이프타운 최고의 관광지라서 인지 테이블 마운틴까지 가는 대중교통이 굉장히 편리하고 쾌적했다. 도시 어디서 버스를 타던지 한 번은 거쳐가는 도심 환승 센터까지 이동 후에 테이블 마운틴 방향 버스로 갈아탔다. 버스에서 내리자 바로 앞에 대중교통으로 찾아온 사람들을 위한 무료 셔틀이 테이블 마운틴 입구까지 이어졌다. 처음 가는 곳임에도 전혀 불편함이 없도록 안내하는 교통 시스템은 마치 낯선 여행자를 테이블 마운틴으로 빨아들이는 인상마저 느끼게 했다. 시내 교통수단이 우수하기로 유명한 한국에서 온 여행자를 만족시킨 수준이면 정말 훌륭한 것 아닌가?
셔틀버스가 내려준 곳은 테이블 마운틴 정상으로 이동시켜주는 케이블카의 출발점이었다. 으레 이런 곳은 엄청나게 긴 줄을 서며 기다려야 하겠지라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올라갔지만, 생각보다 커다랗고 빠른 케이블카 덕분에 긴 기다림 없이 올라탈 수 있었다. 심지어 그 커다란 케이블카는 빙그르르 회전을 하면서 산 정상을 향하고 있어서 전망 좋은 창가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케이프타운의 전경을 360도 감상하며 몸에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산 정상의 역에 도착했다. 산 정상이라고 하지만 테이블 마운틴이라는 이름처럼 산 꼭대기는 거대한 평지였다. 깎아지는 수직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넓은 평지에 서있으니 마치 거인의 테이블을 기어올라간 소인국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변화무쌍한 날씨 탓에 테이블 마운틴에서 경치를 즐기기 쉽지 않다는데, 날씨 운이 좋아서였을까? 다행히도 선명한 모습의 도시 전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테이블 마운틴에서 내려다본 케이프타운은 어제 라이온 헤드에서 본 것과 또 다른 모습이었다. 마치 테이블 마운틴이 팔을 넓게 펼쳐서 도시를 끌어안고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케이프타운은 아프리카의 관문이자 남아공이 시작된 도시라서 '마더 시티'라고도 불린다지만, 테이블마운틴에서 내려다보니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듯이 산이 도시를 품고 있는 형상이라서 그렇게 불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 어디서든 뒤를 돌아보면 병풍처럼 테이블 마운틴이 보이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산의 품 안에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평온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테이블마운틴의 정상은 잘 정리된 산책길을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한나절이 걸릴 정도로 꽤나 넓고 평평한 공원이었다. 산의 경계에 가지 않는다면 이곳이 산 정상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절벽의 끝에 테라스와 같은 바위 위에서 경치를 내려다보며 도시락을 먹기도 하고, 거미줄처럼 퍼져있는 산책길을 따라 아내와 도란도란 걷다 보니 하루가 저물어갔다. 이제 거인의 테이블에서 내려올 시간이다.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산아래로 내려와서 크리스틴의 집으로 돌아가는 반대 방향으로 버스를 탔다. 어제 라이온 헤드에서 크리스틴이 말해준 테이블 마운틴 너머의 Camps bay에 가기 위해서였다.
꼬불꼬불한 경사길을 버스가 달리는 중에 창밖으로는 멋진 저택들이 눈에 들어왔다. 산을 등지고 바다를 바라보는 경사면을 따라 부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케이프타운에 머무는 며칠 동안 아프리카에 대한 선입견이 많이 사라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유럽의 고급 주택가 같은 풍경을 볼 때마다 아프리카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 같은 생경함이 느껴졌다. 오랜 기간 만들어진 선입견을 깨기란 쉬운 일이 아닌 듯하다. 버스에서 내려 Camps bay 해변에 들어서자 해가 지기 시작했다. 온종일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보낸 시간을 마무리하려는 듯이 발갛게 물든 해가 수면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오래전 우리의 조상들이 태양을 숭배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천문학의 발달로 태양을 신격화까지 하는 일을 없지만 여전히 태양이 뜨고 지는 모습은 장엄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감을 들게 만든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먼 곳에서 보내는 저 빛 덕분에 우리가 생존하고 있으며 인류의 긴 역사가 이어지고 있음을 생각하면 가끔씩 인간이 스스로 이룩했다는 문명들이 참 보잘것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칼 세이건이 말한 그 희미하고 푸른 점에서 아웅다웅하고 있는 먼지들을 떠올리면 마음속에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던 욕심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저 거대하고 붉은 태양 앞에서는 Camps bay에 사는 백인들도 타운쉽에 사는 흑인들도 한가로이 여행 중인 나도 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서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겸허해지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