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 머무는 동안 이 도시의 매력에 흠뻑 빠져버렸다. 아프리카라고 하면 으레 동물의 왕국이 먼저 떠오르는 고정관념을 깨어준 세련된 도시와 역시 야생의 땅 아프리카구나 라고 생각을 다시금 들게 해 준 눈부신 자연경관. 케이프타운은 문명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완벽한 도시였다. 게다가 건조하고 서늘한 날씨마저도 나의 취향을 완벽히 사로잡아 버렸기에, 바다가 펼쳐진 공원에 누워 시원한 바닷바람과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느끼며 기약 없이 퍼져있고 싶었다. 오랜 여행으로 지쳐가던 중에 낙원같이 곳을 만나서일까? 문득 이곳에 정착해버리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곳 케이프타운은 남아프리카 여행의 시작점에 불과했으니 여기에 머물고만 있기에는 아직 만나지도 못한 미지의 땅이 너무도 많았다. 슬슬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케이프타운을 출발점으로 시작될 남아프리카 여행은 남아공 서부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서 나미비아로 입국하여 보츠와나, 짐바브웨를 거쳐 남아공 동부로 돌아오는 시계방향의 경로를 계획했다. 다시 남아공으로 입국하게 되면 에스와티니(스와질란드)를 거쳐 가든 루트로 알려진 남아공의 남쪽 해안선을 따라 케이프타운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여행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남미를 여행하던 중에 틈틈이 여행 준비를 해왔었지만, 아프리카 여행을 위한 정보는 턱없이 부족했다. 아직은 대중적인 여행지가 아니라서 인지 인터넷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그나마 관광 포인트에 대한 자료는 조사가 가능했지만 대중교통에 대한 정보는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막상 케이프타운에 도착해서 알아보니 아프리카 지역의 도시 간, 국가 간 대중교통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었다. (어쩌면 내가 못 찾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커다란 트럭을 버스로 개조한 차량을 타고 일정한 루트를 따라 이동하는 '트럭킹'이라고 불리는 패키지여행 상품을 활용하고 있었다. 그동안 일정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여행해오던 터라 일정과 경로가 결정되어 있는 패키지여행 상품이 그리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캠핑을 하기로 결정했다. 지난해 유럽을 여행할 때에 자동차를 리스하고 캠핑 장비를 싣고 유럽 이곳저곳을 3개월 정도 캠핑 여행을 했었다. 직접 운전하면서 이동했기에 일정과 경로가 자유로워서 좋은 곳에서는 길게 머물기도 하고 실망스러운 장소는 빨리 지나치며 제한된 기간을 알차게 활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유럽인들도 긴 휴가를 맞아 여행을 다니는 극성수기 시즌에도 캠핑장은 대부분 여유로운 상황이어서 숙소 예약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어깨 위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될 수도 있고 비용마저도 적게 드니, 자동차 캠핑 여행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세계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 아프리카에서는 캠핑 여행을 하려고 생각했었다. 한 번쯤은 아프리카의 끝없는 지평선을 달리고 대자연 속에서 야생동물들의 소리를 들으며 별을 이불 삼아 잠들어 보고 싶었다.
일단 자동차 캠핑 여행에 가장 중요한 자동차 렌트가 필요했다. 아프리카 밀림을 달리는 사륜구동 차량을 상상하며 렌터카 사무실로 들어섰지만, 한 달 이상의 긴 기간 동안 큰 차량을 빌리기에는 나의 예산은 턱없이 부족했다. 케이프타운에 있는 대부분의 렌터카 회사를 돌았지만 한 달을 넘는 기간 동안 차를 빌릴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국경을 넘나드는 여행 경로를 설명하자 고개를 가로저으며 적절한 서류를 발급하기 위해서는 방문 국가의 비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차, 나미비아 비자.
여행을 다니다 보면 우리나라 여권을 부러워하는 다른 나라 여행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마치 자유이용권처럼 대부분의 나라를 비자 없이 입국이 가능한 우리나라 여권의 파워는 막강했다. 이번 세계여행 중에 별도로 비자를 별도로 발급받았던 국가는 손에 꼽을 정도로 국가별 출입국에 대한 준비가 크게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나미비아는 예외였다. 장기 여행자들 사이에서도 남미의 볼리비아와 더불어 비자 서류가 까다로운 국가 중에 하나가 바로 나미비아였다. 비자신청서와 사진은 기본이고 여행 일정표, 여행 동기 및 목적 에세이, 은행 거래 내역서, 숙박 예약 확인증 그리고 출입국 교통편 증명서 등이 필요했다. 열심히 서류를 준비해서 대사관을 찾아갔건만 바로 출입국 교통편이 나를 가로막았다. 렌터카를 이용해서 입국할 계획이라고 했더니 렌터카 계약서를 제출하라고 했다. 렌트를 하려면 비자가 필요하고 비자를 발급 받으려니 렌트 계약서가 필요하다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우선은 교통편 증명을 위한 차량 렌트가 우선이었다. 국가마다 사무실을 가지고 있는 다국적 렌트 회사를 찾아가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간신히 차를 빌릴 수 있었다. 비록 기대했던 사륜 구동차나 캠핑용 밴이 아닌 소형 해치백 차량이긴 하지만, 다른 국가로 출국이 가능하도록 서류도 받을 수 있었고 차 뒤편에 남아공 차량임을 알리는 'ZA'라고 크게 써있는 스티커와 함께 차를 인도받았다. 드디어 날개가 생겼다. 곧바로 다시 나미비아 대사관을 찾아가서 비자를 신청했다. 발급까지는 수일이 소요된다고 했다.
자동차 렌트를 하고 나자 다른 준비들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비자 발급을 기다리는 동안 캠핑 용품 준비를 시작했다. 3개월간의 유럽 캠핑 여행 경험 덕분에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것은 굳이 필요하지 않은지가 확실했기에 미리 목록을 작성하고 게임 속의 숨겨진 아이템을 찾아 모으듯이 도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의외로 아프리카는 캠핑 문화가 상당히 발달되어 있었다. 도시 외곽에는 대형 캠핑장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고 대형마트 어디서나 캠핑에 필요한 물건들을 손쉽게 구입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나 유럽의 캠핑 용품점처럼 고가의 편의 장비들이 즐비하지는 않았지만, 간단히 밥을 해 먹고 잠을 잘 수 있는 단출한 캠핑을 준비하는 데에는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우리의 집이 되어줄 텐트는 우리 돈으로 약 7만 원에, 주방이 되어 줄 핫플레이트는 1만 5천 원 정도의 가격에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 그밖에 침낭, 에어매트, 캠핑의자, 렌턴, 주방용품 등을 구비하는 데에 쓴 비용은 며칠 숙박비에 해당하는 정도였기에 캠핑 여행은 비교적 경제적이었다. (유럽 여행 때는 마지막 캠핑장에서 garage sale 식으로 캠핑 용품을 되팔아서 마지막까지 지출을 회수하기도 했었다.) 매일 외출하고 돌아올때마다 한아름 캠핑 용품들을 사서 들어오는 모습에 놀라던 크리스틴은 우리와 같은 게스트는 처음이라면서 무척이나 관심을 보이며 어디서 필요한 물건을 구할 수 있는지 도움을 주었다.
며칠 사이에 나미비아 비자가 발급되었다. 비로소 아프리카 자동차 캠핑 여행의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우리가 머물던 작은 방을 가득 채웠던 캠핑 용품을 자동차 트렁크에 차곡차곡 넣고 드디어 아프리카 자동차 캠핑 여행을 출발했다. 케이프타운 외곽의 대형 쇼핑몰에서 점심을 먹고 도시를 벗어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식재료와 물을 가득 싣고 미지의 땅으로 이동했다. 케이프타운의 영역을 벗어나자 주변 풍경이 극도로 단순해졌다. 한 시간을 넘게 달려도 집 한 채 볼 수 없었고 주변은 나무도 풀도 아닌 것들이 듬성듬성 박혀있는 황무지뿐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 너머로 점이 되어 사라지며 길게 이어진 도로를 달리고 있자니 노란 벽돌 길을 따라가는 도로시가 된 기분이었다. 이 길의 끝에 어떤 곳이 펼쳐질지, 오늘은 어느 곳에 도착하게 될지, 무슨 일을 겪게 될지 전혀 예측도 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여행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첫 캠핑지에 도착하자마자 마치 우리를 시험이라도 하듯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