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민 Aug 23. 2021

12. 이 나라를 떠나라고요?

블라이드 리버 캐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어떻게 된 영문인지 나와 아내는 서로 다른 체류 기한이 찍힌 비자를 받아 들고 남아공으로 입국하게 되었다. 여권에 찍힌 비자 도장에 의하면 나는 한 달 뒤, 아내는 일주일 뒤에 남아공을 떠나야 했다. 지금 당장 항공권 일정을 변경하고 차를 돌려 케이프타운을 향해 쉬지 않고 달린다 해도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너무 가혹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사건을 배경은 이러했다. 당시 대한민국 국민은 30일간 무비자로 남아공에 체류가 가능했다. 하지만 체류 기한을 넘기는 경우, 여느 나라들처럼 잠시 다른 나라에 갔다 오는 것으로 비자를 갱신하는 일이 불가능하고 자신의 국적국을 갔다 와야만 다시 30일을 받을 수 있었다. 체류 가능일을 넘길 경우에는 재입국 만으로는 갱신이 되지 않기에 임시로 허가해주는 일주일의 추가 체류기간 안에 출국하거나 정식으로 체류 비자 연장을 받도록 하고 있었다. 우리는 처음 남아공에 도착했을 때에 이미 한 달짜리 비자를 받았었고 그 이후에 나미비아, 보츠와나를 거치면서 한 달이 넘어서 재입국했기에 아내가 받은 체류 기한이 적법한 조치였고, 오히려 나에게 새로운 30일짜리 입국 비자 도장을 찍어준 직원이야말로 실수를 한 셈이었다. 꼼꼼하게 조사를 하지 않고 보통의 나라들처럼 국경을 넘어갔다 오면 당연히 다시 체류일이 리셋될 거라 생각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우리의 일정을 뒤흔들었던 남아공의 Groblersbrug 출입국 사무소


 새로운 퀘스트가 생겨버렸다. 문제는 이미 발생했으니 어떻게든 대처를 해야 했다. 원래 여행이라는 게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고 그럴 때마다 낙담하지 않고 어떻게든 헤쳐나가는 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남아공 국경은 무사히 넘어왔다는 점이니, 최악의 상황은 피한 셈이었다. 막상 국경을 넘고 나니 눈앞의 문제는 비자 연장보다는 당장 오늘 밤을 보낼 곳을 찾는 일이었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적당한 캠핑장을 찾아서 텐트를 치고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하기에 서둘러 차를 몰았다. 다음 여행지로 계획했던 블라이드 리버 캐년까지는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도 아니었고, 비자 문제 해결도 시급했기에 일단은 남아공의 행정 수도인 프리토리아로 향하는 길에서 만난 모디몰레(Modimolle)라는 아주 작은 마을에 머물기로 했다.


 구글맵에서도 한참은 확대해야 찾을 수 있는 모디몰레는 프리토리아에서 2시간가량 떨어진 지역이었다. 마을 외곽에 도시에서 은퇴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주택 단지들과 골프장이 있었고, 그 한편에 자리 잡은 캐러번 파크에서 텐트를 칠 수 있었다. 관광지도 아닌 곳에 동양인 여행자가 갑자기 나타나 주섬주섬 텐트를 치는 모습이 낯설었는지 우리 부부는 리조트 입구에서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을 배경으로 나는 잽싸게 텐트를 치고 잘 자리를 정리하는 동안에 아내는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한국이었더라면 근처 식당에서 한 끼를 해결하거나 간단히 라면을 끓여 먹었겠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식당이나 패스트푸드점을 만나려면 웬만큼 큰 도시를 가지 않고서는 어렵다. 종일 빵과 과자로만 끼니를 때울 수 없었기에 저녁만큼은 번거로워도 냄비로 밥을 짓고 반찬을 준비해야 했다. 이 광경이 현지인들에게는 얼마나 신기했을까? 식사 준비하는 내내 선뜻 말을 걸지도 못하면서 멀리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도 그들도 마음은 열려있었지만, 발은 부족했던 용기만큼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뿔닭의 일종인 '호로새' 들에게 포위당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은 날은 서로 깨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일찍 일어나게 된다. 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치고 캠핑장 리셉션을 찾아갔다. 반갑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 직원에게 우리가 처한 비자 문제를 간단히 설명하고 근방에 도움받을 만한 관공서가 있는지 물어봤다. 안타깝게도 모디몰레는 너무나 작은 동네라서 상설 관공서가 없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방문 공공서비스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가장 가까운 도시인 모코파네(Mokopane)에 가야 한다는데, 근처라고는 했지만 사실 120km도 넘게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한참을 운전해서 찾아간 모코파네도 모디몰레만큼이나 작은 동네였다. 한적한 거리에서 우리나라의 구청이나 주민센터의 역할을 하는 "Home Affairs" 건물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낡은 벽돌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또다시 유명인사가 되어 버렸다. 주변 수 십 km 내의 유일한 관공서인 만큼 이른 시간부터 찾아온 많은 사람들의 눈동자가 한없이 긴 줄의 가장 끝을 가리키고 있었다. 차례를 기다리다가는 오늘 하루를 이곳에서 보낼 것 같은 예감에 기다리는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외국인 찬스'를 쓰기로 했다. 행정 안내를 담당하시는 것으로 보이는 분에게 사정을 설명드렸더니 여기선 외국인 비자 관련 업무를 할 수 없으니 더 큰 도시에 있는 외무 담당 관공서를 찾아가라며 주소를 알려줬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걸까... 이러다가 수도에 있는 영사관까지 가야 할 듯싶었다.


우리나라의 주민센터와 같은 Home affairs.


 어차피 오늘 하루는 남아공의 관공서 투어 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100 km 떨어진 주도(州都) 폴로콰네(Polokwane)로 갔다. 2003년 이전에는 피터즈버그로 불렸었다는 폴로콰네는 제법 도시 느낌인 나는 큰 도시였다. 중심 업무지역에는 주정부의 주요 관청들이 모여있었다. 공무원처럼 보이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여권을 보이면서 외무 업무를 담당하는 사무실을 묻고 물어서 다행히 담당 사무관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비로소 나와 아내 여권에 찍힌 비자 만료일자의 진실을 알게 되었고 비자 연장을 위해서는 행정수도 프리토리아에 있는 관공서를 찾아가라고 했다. 관공서에서 다른 관공서로 토스하는 일은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어는 나라에서나 겪을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도시에 가면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허탈한 마음으로 다시 수백 km를 달려 캠핑장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날은 모든 일에 무기력해진다. 집이었다면 라면으로 때웠을 법도 했지만 낯선 땅에서의 저녁식사는 대충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대화도 없이 저녁을 준비해서 먹고 다시 새까만 어둠 속에 몸을 뉘었다.


 어차피 이곳에서 비자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렇다고 당장 출국을 준비할 것도 아니었기에 일단은 여정을 이어가기로 했다. 일찍 캠핑 장비를 정리하고 다음 목적지인 블라이드 리버 캐년을 향해 나섰다. 남아공에 입국 이후로 조금 불편하진 것이 있었으니, 바로 길 찾기였다. 케이프타운을 출발하여 나미비아와 보츠와나를 거쳐서 오는 길은 사실 길이 하나밖에 없어서 길을 잃으래야 잃을 수 없는 경로였으나, 남아공에 들어선 이후부터는 매번 만나는 교차로마다 길을 의심해야 했다. 아날로그 감성이 가득한 깡통 옵션의 렌터카에 내비게이션이 있을 리 만무했고,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은 캠핑장을 리셉션을 벗어나는 순간 세상과는 단절되어 버렸다. 여행 전에 지도 앱을 다운로드하여서 준비하긴 했지만, 긴 여행 중에 내 스마트폰은 더 이상 스마트함을 포기하였고 GPS 신호를 못 들은 척 무시하고 있었다. 결국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지역 관광 지도에 의지해서 길을 찾아가야 했고 매번 도로번호를 외워서 길을 찾아갔다. 스마트폰에 의지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는 내가 스마트해질 수밖에 없었다.  


미리 지도를 보고 갈림길에서 선택해야 할 도로번호를 메모하여 출발하였다.


 아날로그 내비게이션을 이용하였지만 아무런 문제 없이 목적지인 블라이드 리버 캐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황량한 벌판만 보면서 달려왔는데 블라이드 리버 캐년에 다다르자 세상은 초록의 물결로 가득해졌다. 눈이 시원해지고 마음이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찾아간 캠핑장은 블라이드 리버 캐년에서도 시설, 규모 면에서 매우 유명한 곳이었다. 지금까지 방문했던 캠핑장이 작은 모텔 수준이라면 이곳은 5성급 리조트라고 부를 만했다. 집채만 한 나무들이 우거진 숲에 자리 잡은 텐트 구역과 욕조까지 완비된 완벽한 샤워실은 물론이고 숲 곳곳에 숨어있는 레스토랑, 놀이공간, 수영장까지 캠핑족이 꿈꾸는 모든 것이 구현된 곳이었다. 무엇보다도 우리 부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캠핑장 내부에서 출발하는 트래킹 코스였다. 캠핑장 규모가 너무나 커서 눈치채지 못했었는데 사실 캠핑장은 블레이트 리버 캐년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무 데크로 잘 정리된 길을 따라 조금만 걸으면 만날 수 있는 전망대에서는 웅장한 녹색 협곡을 시야에 가득 채울 수 있었으니, 이보다 더 완벽하게 자연에 녹아든 관광 시설이 있을까 싶었다. 어느새 비자 문제의 걱정은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긍정의 주문과 함께 봄볕의 눈처럼 사라져 버렸다.


거대한 나무가 우거진 멋진 캠핑장, 역시 남아공 캠핑장에는 브라이(바베큐) 시설이 빠질 수 없지.


 잠시 걱정을 내려놓고 여행자로 돌아온 우리는 며칠간 열심히 블라이드 리버 캐년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블라이드 리버 캐년은 미국의 '그랜드 캐년', 얼마 전에 만났던 나미비아의 '피쉬 리버 캐년'에 이어서 세계에서 3번째로 큰 협곡으로, 앞의 두 협곡이 황갈색 황무지의 사막 같은 분위기라면 블라이드 리버 캐년은 녹색으로 가득한 숲의 협곡이다. 아직도 수량이 풍부한 강과 호수가 있어서 인지, '피쉬 리버 캐년'이 오래된 화석 같은 모습이었다면 이곳은 살아 숨 쉬는 생물 같은 느낌을 주었다. 40억 년 전에 블라이드 리버가 깎아낸 협곡의 조각품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장엄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동안에는 영화 아바타의 세계에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당장이라도 저 깊은 협곡 아래에서 용이 솟아 올라올 것만 같았다.


캠핑장에서 이어지는 블라이드 리버 캐년 전망대
녹색의 장엄한 전경의 블라이드 리버 캐년


 블라이드 리버 캐년을 따라 달리는 파노라마 루트는 협곡의 경계를 따라 만들어진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이다. 나무가 빽빽한 숲이 내 옆을 따라 달리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짙푸른 평야가 나를 따라잡아 주위를 에워싸기도 했고, 갑자기 절벽 아래 펼쳐진 거대한 협곡이 나를 삼킬 듯이 따라붙어 오기도 했다. 거대한 풍경화 속의 작은 소품이 된 듯한 느낌으로 달리다 보면 드문드문 숨 막히는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나 관광 명소들이 나타났다. 그중에 'Bourke's Luck Potholes'은 물이 깎아놓은 기암괴석으로 만들어진 계곡으로, 자연이라는 예술가의 조각품을 걷고 만지며 감상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 밖에도 파노라마 루트에서 아름다운 경치, 소박한 사람들의 아기자기한 마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아프리카에 오기 전에 생각했던 풍경과는 너무도 다른 초록의 풍경을 보며 그동안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보잘것없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물이 흐르면서 깎아놓은 기묘한 계곡 위를 다리로 돌아볼 수 있는 Bourke's Luck Potholes


 관광객의 모습으로 며칠을 지나는 동안 아내의 비자 만료일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우리도 아무런 대책 없이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출국을 하라는 명을 받았으니, 진짜로 출국을 할 셈이었다. 다만 출국 후에 향할 곳이 한국이 아니었을 뿐이었다. 어차피 문제가 된 체류 일정을 재출국/재입국을 통해 다시 리셋해보려는 꼼수를 부리기로 했다. 캠핑장 리셉션에 받아온 지도를 펼쳐 놓고 가까운 국경을 찾아보았다. 다시 뒤로 돌아서 보츠와나나 짐바브웨로 가기는 싫었고, 가장 가까운 국경인 에스와티니 (당시는 스와질란드로 불렸으나 2018년에 국명을 에스와티니로 변경)로 향하기로 했다. 나라 이름도 생소한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언어는 무엇인지, 통화는 어떤 것을 사용하는지, 여행할 만한 명소가 있는지 전혀 모른 채로 가장 가깝다는 이유 하나로 국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사실 조금만 조사했었더라면 에이즈 감염률이 세계 최고라는 절대왕정국가를 선뜻 가겠다는 결정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행 중에 즉흥적인 결정은 때로는 위험을 불러오기도 하고 가끔은 의외의 행운을 가져오기도 하는데, 이번 결정은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까 다시 한번 운에 몸을 맡겨보기로 했다.


여기부터 에스와티니(스와질란드) 라고 알려주는 국경선 표시판


  에스와티니의 서부는 고산지대로 되어 있어서 국경을 넘으려면 험한 길을 따라 산을 넘어야 했다. 꼬불꼬불 산길만 만나면 멀미를 하는 아내를 위해 조금 멀더라도 산맥을 우회하는 평지로 입국하기로 루트를 잡았다. 장거리 이동이 계획되어 있는 날이었던 만큼 아침부터 서둘러 캠핑장을 정리하고 출발했지만 에스와티니 근방에 왔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가 되어 버렸다. 안 그래도 늦었는데 평지로 입국하는 평탄한 길에는 이미 차들로 가득했다. 다들 차멀미가 두려운 사람들이었던 걸까? 아님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그날인 걸까? 해가 지기 전에 국경을 통과해서 오늘 잘만 한 곳을 찾아야 하는데, 조급한 내 맘과는 달리 도로 위의 차들은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도로 공사로 차선을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한참을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해가 지기 직전에야 국경에 도착하여 에스와티니 입국 심사를 마칠 수 있었다. 비자 문제는 일단 미봉책으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막상 에스와티니에 입국하고 나니 앞길이 막막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오늘 밤은 어디서 보내야 할지... 그러는 중에 눈앞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길을 분간할 수도 없이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