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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집 - 충방 아파트

by 자낫

하우스 푸어의 비애를 벗어 던지려

자산의 98%가 집이다. 빚은 자산의 1/3이다. 일명 하우스 푸어다.


전세사기를 두 번이나 당했다. 두 번 다 인간의 밑바닥까지 보고 남의 집에 사는게 두려워졌다. 주거 불안정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도대체 어디에 정착할 것인가. 오랫동안 품고 있는 고민이다.


살아온 집을 돌이켜보면 앞으로 살 집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에 집에 대한 경험을 더듬어본다. 기출문제 풀고 시험에 대비하듯이.


인생 최초의 집

어린 시절 최초의 기억이 있던 때의 집은 충남 예산 신례원에 있는 충방 아파트이다. 돌쟁이 때부터 교복을 입기 시작할 무렵까지 살았다. IMF가 이 작은 시골 마을까지 덮친 96년도에 떠났다.


'충방'은 '충남방적'의 줄임말이고 충방 아파트는 충방 사원 아파트이다. 기혼자 사원이 가족과 입주할 수 있는 아파트였다. 우리집은 3동 313호였다. 충남 예산군 예산읍 창소리 58번지 충방아파트 3동 313호. 어린이 유괴가 한창이던 시절이라 한글을 떼기 전부터 집 주소를 달달 외웠다.


엘레베이터가 없는 5층 건물이었고 총 5동이었다. 아파트 앞에 김장독을 묻었다. 아파트 단지 내 유치원을 파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3동 현관 앞 뜰에서 엄마가 이웃 아줌마들과 김장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방 2개, 반들반들한 나무 마루가 깔린 거실, 앞/뒷 베란다, 쪼그려 앉는 변기가 있는 수세식 화장실, 부엌과 연탄광이 있었다. 쓰레기는 검은 봉지에 담아 뒷 베란다 벽장문을 열어 넣게 되어있었다. 쓰레기 봉지들이 관을 타고 내려와 1층에 쌓이는 형식이었다. 20평이 될까말까한 집이었다.


가끔 경비실에서 확성기로 방송을 했는데 웅왕웅왕 말이 뭉게져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엄마는 용케도 잘 알아들었다. 경비실은 아파트 정문에 하나 있었고 꽤 넓었다. 경비는 나이 든 키 작은 아저씨 한 명과 키 크고 마른 장난기 많은 청년이었다. 평수가 모두 같았고 살림살이는 고만고만했다.


충방아파트는 신례원 최초의 아파트였다. 후에 성문 아파트, 풍진 아파트, 청천 아파트 등이 생겼다. 80년대와 90년대 중반까지 경기는 호황이었고 충방의 기계는 3교대 근무로 24시간 돌았다. 신례원 초등학교 전교생은 천명이 넘었다. 당시 30대였던 아빠는 퇴근 후 미취학 아동인 여동생과 나를 이끌고 신축 아파트 모델 하우스를 구경가곤 했었다. 새로 올린 신아파트의 옥상에 올라가보기도 했다.


최초의 집의 최후

충방은 IMF 무렵 대대적으로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충방 아파트도 허물기 시작했다. 한 집 두 집 떠났다. 우리집은 꽤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사람이 살던 집의 문이 활짝 열려있고 방바닥에는 신발 자국이 어지러이 찍혀있었다. 북적이던 동네가 을씨년스러워지고 폐허 같은 풍경이 마음에 고스란히 남았다. 이상하게 사람의 마음에는 밝은 시절보다 슬픈 장면이 더 선명히 남는다. 열 네 살 때 목격한 충방이 비워진 장면은 홀로코스트 영화 피아니스트의 포스터 같았다.


충방 아파트 부지는 한 건설회사가 인수해서 새 아파트를 세우다 2007년 부도가 나 공사가 중단되었다. 12층 시멘트 구조물이 20년 가까이 우두커니 서있다. 선거철이 되면 이 흉물을 바꿔보겠다는 공약이 난무하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어보인다. 2019년 도시재생사업에 선정되고 LH 공사가 공공임대주택을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자재값, 인건비 인상으로 군에서도 돈을 109억원이나 보태라고 하여 답보 상태다.


꿈꾸는 집 - 문화 시설 가까이

신례원에 살 때 주위 사람들에게 왜 서울에 살고싶냐고 물어보면 자주 듣는 대답 중에 하나가 '문화 생활'이곤 했다. 그 문화 생활, 굳이 서울까지 안가도 충분히 누릴 수 있다면? 굳이 비싼 돈 주고 서울에서 꼬딱지만한 방에서 살 필요가 없다. 80년대 영광을 누린 방적공장에서 빈티지 패션쇼를 한다거나 짓다 만 아파트 건물에서 밴드 공연을 하거나, 현지 농산물로 쿠킹 클래스를 연다. 일회성이 아니라 공방, 연습실, 작업실을 저렴한 금액으로 임대한다.


2년 전 예산군은 더 본 코리아의 백종원 대표와 함께 충남방적을 이러한 문화예술복합단지로 개발하기로 했다. 민간 자본 25억, 중앙정부 50억, 충남도 25억, 예산군 25억을 모았다. 백종원의 요리로 인생 구제하는 프로그램 '레미제라블'을 충남방적 건물에서 찍으며 희망이 보였으나 현재 백 대표가 구설수에 오르면서 조용하다. 충방 재건 프로젝트가 계획대로 완성되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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