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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래진 Nov 21. 2020

엄마의 마이크

세 번째 이주 : 트로트

"참가번호 65번 OOO님~!"

날고 기는 동네 인싸들은 다 모인 전국 노래자랑 예선 심사장, 어색한 입꼬리를 하고 있던 엄마는 마이크를 성물처럼 꼭 쥐고 무대에 올라갔다.


벌써 몇 년도 더 지난 일이라 엄마가 자기소개를 어떻게 했는지,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붉게 물든 얼굴, 경직된 미소, 박자를 맞추듯 함께 떨리던 목소리와 손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내가 알던 엄마는 노래부를 때만큼은 떨지 않았기에, 그 모습이 무척 생경했다.


예나 지금이나 엄마는 트로트를 좋아한다. 듣는 것과 부르는 것을 모두 좋아하는데, 특히 명절에 친척들이 모여 노래방을 갈 때면 그곳을 디너쇼로 만들곤 했다. 박 씨 가문의 공식 가수랄까. 그래서 엄마가 무대 위에서 긴장을 했다는 사실이 와 닿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왜 그렇게 온몸으로 떨려했는지 알게 됐다.



첫 번째 이주에 등장했던 깡촌에 내가 아닌 엄마가 살던 시절, 일곱 남매 중 여섯 째였던 엄마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누릴 수 있는 게 많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 라디오는 들을 수 있어서 큼지막한 라디오로 노래를 듣는 게 거의 유일한 낙이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로 유일한 낙이였냐면, 밭을 매러 갈 때도 보자기에 라디오를 감싸 메고 갔다고 한다. 초등학생이 미국의 올드 래퍼도 아니고 몸통만큼 커다란 라디오를 mp3처럼 들고 다니다니. 게다가 집에서 라디오를 들을 때면 흘러나오는 노래를 그대로 받아 적어 마치 믹스 테이프처럼 믹스 가사집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항상 바쁜 농촌 생활은 점점 가사를 쓰는 시간보다 잡초 제거에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만들었고, 쌓인 서러움은 결국 스스로 가사집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미약하게 자라나던 가수의 꿈은 찢긴 가사집처럼 조각이 나고 말았다.



엄마의 깡촌 힙스터 시절을 듣고 나니 예선 탈락 후 엄마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과거의 내가 한심했다. 눈곱만큼의 효심으로 따라갔던 사춘기의 나는 엄마의 꿈을 지지하거나 위로의 말을 건네는 살가운 아들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도 그리 살갑지는 않지만, 눈곱만큼의 효심이 코딱지만큼 자라나긴 한 것 같다. 엄마의 '우리 영웅이' 이야기를 한참 듣고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도 함께 열심히 보고 있으니 말이다.



글쓰기 모임 <이주>

이 주에 한 편씩 생각을 글로 옮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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