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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각시 Feb 06. 2020

<정치적인 식탁> 차리는 사람과 받아먹는 사람

북리뷰

<정치적인 식탁> 이라영





명절 때 친가에 가면 식탁에는 이름표라도 붙어 있는 것처럼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큰아버지부터 사촌오빠들까지 남성은 크고 네모난 반듯한 식탁에 둘러앉았고, 며느리와 딸들은 동그란 소반에 앉았다. 네모난 식탁에 앉는 여성은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인 할머니가 유일했다.


네모난 식탁은 거실의 정중앙에 놓였고, 동그란 소반은 부엌 바로 옆에 위치했다. 나의 엄마를 비롯한 며느리들은 가장 늦게 식탁에 앉아 가장 빨리 일어나곤 했다. 각종 요리를 하고 단정하게 접시에 담아내느라 가장 늦게 앉았고, 남자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면 과일 등 후식을 준비하러 본인의 식사를 마치기도 전에 식탁에서 먼저 일어났다. 차리는 사람과 받아먹는 사람, 수저를 놓는 사람과 이를 기다리는 사람은 이렇게나 달랐다. 


밥상은 단순히 밥을 먹는 공간이 아니다. 한 가정 안에서뿐만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 무엇을, 누구와, 어떻게 먹는지는 늘 정치적 화두다.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은 재래시장의 허름한 식당을 찾아 국밥을 먹고, 여야가 협치의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면 노타이 차림의 맥주회동을 벌인다. 청와대에서 국빈들을 맞이할 때 어떤 메뉴가 선정되는지 또한 신문의 정치·사회면을 장식한다. 밥상은 권력이 개입된 정치적인 공간이다.


이라영의 <정치적인 식탁>은 “먹기를 둘러싼 인간의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1~3장은 먹는 여자·만드는 여자·먹히는 여자 등 젠더화된 식탁을 다루고 4~6장은 먹는 입·말하는 입· 사랑하는 입 등 계층화된 식탁에 집중한다. (사실 챕터 구분이 엄밀하진 않다)


4~6장 보다는 1~3장이 더 흥미로웠다. 1장 <먹는 여자>를 내 식대로 요약하면 '아무거나 먹지 못하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여성은 감자탕을 먹으면 '개념녀'가 되고, 브런치를 먹으면 '된장녀'가 된다. 엄마들의 경우 아이가 남긴 밥을 먹지 않으면 "네 엄마는 유별나서 애들이 남긴 밥은 안 먹더라"라는 얘기를 들어야 한다. 저기요, 아빠는요? 


2장 <만드는 여자>은 한마디로 '셰프는 될 수 없는 부엌데기'에 대한 챕터다. 부엌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대체로 여성의 몫으로 전가되지만 가정을 벗어나 직업의 영역으로 옮겨가면 셰프는 모두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가사노동의 불평등과 비가시화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장이었다. 3장 <먹히는 여자>는 '강간문화와 사물화된 여성'에 대해 다뤘다. 여기서 재밌었던 지적은, 남성 성기를 사물에 비유할 때 이는 성적 대상화라기보다 남성성의 과시용이라는 점이었다. 저자는 왜 바나나와 소시지 등으로 비유되는 남성 성기의 모습은 늘 평상시가 아닌 발기된 상태인지에 대해 묻는다. 


이 책은 부엌과 식탁에서 정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지적하고, 생각해 볼만한 지점들을 던져준다. 부엌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공간으로 여겨져 왔다. 남에게 아내를 말할 때 ‘집사람’ ‘안사람’이라 칭하고 부부를 ‘내외’라 부르며 ‘김여사’를 향해 “솥뚜껑 운전이나 해라”란 말들은 모두 여성이 집 안에 있어야 하는 사람, 부엌에서 요리를 하는 사람이란 통념에 기반하고 있다. 더 이상 ‘아침밥 차려주는 부인’이 신혼생활에 대한 로망으로 언급되지 않고, 중년·노년 여성들이 졸혼이라는 방식만으로 밥하기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지 않아야만 부엌이 가족 모두를 위한 공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침밥과 6첩 반상 타령을 하는 분들께 권하고 싶은 책이다. 정 먹고 싶을 땐 제 손으로 차려 드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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