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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각시 Dec 26. 2019

난 쓸모없는 사람일까

[서른, 무직입니다만 01]

서른 무직입니다만
서른 살 백수. 시험용 글쓰기가 아니라 내 얘기를 쓰고 싶어서 시작한 에세이.


“너는 왜 이렇게 쓸모가 없냐.”

어릴 적부터 언니에게서 종종 들은 말 중 하나다. 자기 대신 보낸 엄마 심부름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 혹은 신신당부한 가요 프로그램 녹화를 깜빡하고 놀이터에서 놀았을 때 등 어린 시절 꽤나 ‘쓸모없는 인간’ 소리를 듣고 자랐다. 언니는 학교에서 배운 수업 내용을 왕왕 퀴즈로 낸 뒤 “그것도 모르냐”며 핀잔을 주기도 했는데, 그때에는 ‘쓸모없는데 무식하기까지’ 한 사람이 됐다.


어리다고 해서 ‘쓸모없다’란 말이 주는 자괴감과 모욕감이 작진 않았다. 그 말을 듣는 게 불쾌하고 싫었지만 ‘그만해’란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4살 터울이란 위계의 힘이 작용했던 건지,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신 탓에 언니의 보살핌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탓인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그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내가 택한 방법은, 내게 주어진 미션을 이전보다 더 잘 해내려고 애를 쓰는 것이었다. 단순히 불쾌한 말을 피하려기보다 언니에게 ‘쓸모 있는 인간’이란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쓸모가 있어야만 인간은 가치 있는 존재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 건 머리가 더 굵어지고 나서였다. 사르트르가 말했듯, 그 형태가 만들어지기 전에 쓰임새가 미리 정해져 있는 사물과 달리, 인간은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로서 스스로 본질을 형성해 간다. 언니가 언어폭력 -  악의는 없었을 것이다 - 을 가한 순간 나는 나의 쓸모를 형성해가는 과정이었을 수도, 언니가 생각하는 ‘쓸모 있다’의 기준과는 다른 모습의 쓸모를 형성한 상태였을 수도 있다. 여러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언니의 인정은 더 이상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됐다. 쓸모의 여부와 무관하게 나의 존재가치는 충분하다는 걸 알았다.


쓸모투쟁은 끝나지 않았다..to be continued..


그렇게 ‘쓸모 투쟁’이 끝난 줄 알았건만 대학 졸업 후 더 가혹한 대상과 맞닥뜨려야 했다. 수십, 수백 명의 인사담당자에게 내 쓸모를 인정받아야 대학 이후의 삶, 즉 월급쟁이의 삶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자기소개서는 ‘내가 이렇게까지 유용한 인간임’을 보여주는 자기 변론이고, 이력서는 나의 이러저러한 쓸모를 점수와 자격증으로 증명해내는 장이다. 회사가 요구하는 교내·봉사활동, 자격증, 경력 등 어느 한 곳에서라도 빈칸이 발견되면 나의 쓸모는 반감이 되어 버리는 -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 여겨지는 - 과정을 줄기차게 겪었다.


‘쓸모 투쟁’은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 종종 서로를 향하기도 한다. 인터넷 취업 커뮤니티에선 “토익 850인데 괜찮나요?” “한국어 2-에서 더 올려야 하나요?” 등 자신의 스펙을 놓고 합격선인지 아닌지를 불특정 다수에게 물어보는 글들이 자주 보인다. 이는 곧 나의 쓸모와 잠재적 경쟁자인 상대의 쓸모를 견주어보기 위한 작업이다. 절대적 기준이 궁금한 게 아니라 취업시장에서 내가 서 있는 위치를 가늠해보려고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방과 나 사이 저울질은 나의 위치를 확인시켜주며 때로 안도감을 주기도 하지만 이는 결국 끊임없는 자기 증명으로 이어져 나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만다. 취업준비생들에게 계속해서 "너 쓸모 있어?" "다른 경쟁자보다 남다른 쓸모야?"라는 질문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이들에게 필요한 위로는 ‘넌 충분히 가치 있는 존재’란 말일 터다. 하지만 이러한 말이 나의 삶을 바꿔주진 않으므로(취업과는 무관하므로) 무책임한 허언에 지나지 않는 걸 알기에, 선뜻 어느 누구도 위로를 건네지 못하는 상황이다. 때문에 사르트르의 말이라도 빌려야겠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그래 난 소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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