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장창 창문 Dec 18. 2015

우연과 운명의 경계에서

브런치 시작 with《500일의 썸머》

 '가장 어떠한 무엇' 


 사람들끼리 만나 서로 지고 있던 삶을 풀어놓고 얘기할 때 꼭 꺼내어 보는 것이 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 음악, 연예인, 영화, 그러다가 조심스레 가장 행복했던 기억, 가장 슬펐던 기억들까지. 스스로에게, 그리고 듣고 있는 상대방에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무엇이 '가장'이라는 수식어를 달 수 있을까 한참  고민해보고는 합니다. 어떤 사람인지 가늠하게끔 하는 척도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또 조심스럽고요. 그래도 하나쯤 '가장 어떠한 무엇'이라며 냉큼 들이미는 게 있는데 다름 아닌 '영화'입니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 가장 사랑하는 영화를 꼽아달라 하면 주저 없이 덮   《500일의 썸머》가 바로 그 작품입니다.




 어떤 점 때문이냐고 물으시면 모든 점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캐릭터들 뿐만 아니라 앵글, 편집 및 구성부터 시작해서 배경이 되는 L.A. 속 모든 로케이션들, 인테리어들, 옷, 소품, 대사, 자막, 목소리, 배경음악, 엔딩 크레딧까지 정말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저에게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영화예요. 사랑스러운데 굳이 이유가 있을까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때문인 것 같지만 주변에도 이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래도 이만큼 이 영화를 좋아하는 분이 계실까, 천생연분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아직 결혼, 아니 연애를 해본 적도 없지만) 상상해봅니다. 이 영화를 처음 마주하게 된  그때를 기억해보면 그렇습니다. '우연을 가장한 운명적인 만남'. 늦은 새벽에 잠들면서 보기 위해 무심코 선택한 영화 한 편이 제 '인생영화'가 될 줄은 몰랐었거든요.  





 (출처 : Daum 영화 포토)


우연과  운명

 

 '남과 여'. 누구나 한  장면쯤 자신을 대입해볼 수 있는 주제이죠. 건축가를 지망했지만 포기하고 직장에 취직해 지루한 일상 속에서 운명의 짝이 나타나길 꿈꾸던 톰 핸슨. 그런 톰 앞에 운명 같은 것은 없다고 믿으며 살아가는 썸머 핀이라는 여자가 나타나게 되고, 500일간 둘의 러브 스토리 아닌 러브 스토리가 펼쳐집니다. 누가 봐도 예쁜 여자, 그리고 누가 뭐라 해도 이 여자가 자신의 유일한 운명이라며 착각에 빠지고 마는 남자 주인공. 영화의 포스터가 말하듯이 '우리 모두는 썸머와 사귄 적'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미처 고려하지 못한 채 너야말로 나의 운명이라고 박박 우기며 억지 부리다가 종국에는 씁쓸함을  맛본 적이 다들 있지 않나요? 두 캐릭터 간의 갈등은, 바로 그 작지만 치명적인 견해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바로 우연과 운명.


 썸머에게 톰을 포함한 모든 것은 우연입니다. 가족도, 직업도, 관계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 뿐. 자신의 삶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꼭 짊어지고 지켜나가야 할 짐으로 삼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만족하고 행복하면 그만. 하지만 톰은 다릅니다. 자신을 남은 인생 동안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줄 유일한 운명의 짝이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죠. 그리고 눈 앞의 썸머를 그 상으로 삼습니다. 그는 썸머의 말 한 마디,  눈짓 하나, 추임새 하나에 모두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조셉 고든 레빗이 연기했기에 순수하고 귀엽게 느껴지는 그 착각들이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는 어찌나 지질한 모습으로 나타나는지요.


 영화를 볼 때 누군가를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별 뜻 없었던 연락과 행동들에 나름대로 주석을 달고는 가슴 설레 하며 지극히 '일방적으로' 그 사람을 내 삶에서 대체 불가능한 등장인물이라고 못 박아버렸죠. 당연히 그 500일의 마지막은 그리 좋지 못했고요. 영화의 결말에서는 내레이션을 통해 결국 운명이 답인지, 우연이 답인지 확실하게 판결을 내리지 않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마지막에 발걸음을 반대방향으로 돌리고 관객을 향해 눈을 찡긋하며 웃어 보이는 톰을 기억하시나요? 결국 우리네 삶이 우연인지 운명인지는 본인의 해석과 행동에 달려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연과 운명의 경계에서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죠. 다만 혼자만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기에 이기적이고 편협한, 자기중심적이기만 한 판단 과정을 거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영화 속 톰이나 글을 쓰고 있는 제가 했던 행동처럼요.

    



 영화가 저에게 가장 크게 내던진 이야기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우연이냐, 운명이냐. 저는 기독교인인지라 자연스레 운명론적인 관점에 손을 들어왔고 세상에 태어나게 된 이유와 목적이 다고 믿고 살아가는 중입니다. 만남뿐만 아니라 헤어지는 것 또한 그 나름의 이유와 의미가 있겠죠. 물론 삶을 둘러싼 많은 요소들에 요목조목  빠짐없이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 피곤하고 성가시게 되기도 합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어쩌다 보니'를 통해 모든 것이 귀결되어 버리는 우연. 눈 앞에 보이는 현상들에 충실하게 임하는,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삶 또한 나름의 가치가 있어요. 가끔은 훨씬 행복해 보이기도 하구요. 해석은 톰의 발걸음과 같이 여러분의 자유. 어쨌든 영화는 개인적인 고민과 맞물려 지금까지 해본 적 없던 진중한 고민을 너무나도 유쾌하게, 밝게, 그리고 사랑스럽게 저에게 던져 주었고 그 고민의 시간 끝에 내린 결론이 지금까지 제 삶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출처 :Amazon.com)


그리고 『행복의 건축』


  사실 이 영화를  운명의 영화라고 생각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주인공인 톰 핸슨이 자주 읽고 있던 책, 알랭 드 보통의 『행복의 건축』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동네 시립 도서관의 열람실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무슨 책이든 4페이지 정도만 읽으면 눈이 감겨버리는 총체적 난국을 타개하고자 적극적으로 책장을 둘러보던 중 같은 제목의 책을 발견했. 별다른 고민 없이 그 책을 읽기로 하고 카운터로 돌아가 앉았고요. 사실은 이 책과의 만남이야말로 결정적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첫 장부터 마지막 페이지를 닫는 순간까지,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너무 신나게 읽어나갔습니다. 물론 건축에 관한 책이에요. 하지만 미학뿐만 아니라 문학, 심리학, 사회학, 철학 등 폭넓은 접근방식을 사용합니다. 이를 통해 건축만이 아니라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던 삶의 다양한 부분에서 색다른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나 뿐만이 아니라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말로 설명하기 힘들어 보이던 다양한 사고방식과 현상들에 대한 알랭 드 보통의 해석과 설명이 왜 그렇게 공감이 가고 명쾌하게 다가왔는지. 이후 너무나도 보통의 글에 푹 빠져 해당 도서관에 있던 그의 저서들을 먼저 모두 찾아보았고, 나중에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을 제외한 모든 그의 저서를 읽고 말았습니다(마르셀 프루스트의 원작을 읽고나서 보고싶은 마음에). 최근 작품인 『영혼의 미술관』과 『뉴스의 시대』까지도요. 여태 해리포터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 했는데.




  《500일의 썸머》가 아직도 저에게 의미 있고, 소중하고, 또 고마운 작품인 이유는 그 어느 것 보다도 알랭 드 보통이라는 작가와 만나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만남을 통해 제 삶과 가치관이 많은 힘과 위로를 얻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의 글들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따뜻하기 그지없습니다. 물론 절대적인 진리로 그의 주장들을 추종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무신론자이고 굳이 따지자면 우연의 손을 더 들어주고 있거든요.  우연이냐 운명이냐의 관점을 떠나서, 현대 사회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의 통찰력은 놀라움을 넘어서 아름답습니다. 그의 글들이 제시한 환상적인 비율의 시각들을 머리로 인용하며 스스로의 가치관에 설득력을 더했다고  표현해봅니다. 이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새롭게 열린 지평과 사고방식들, 그로 인해 더 풍성해진 제 삶을 생각해보면 고맙다는 말로는 너무 부족해요. 《500일의 썸머》, 그리고 『 행복의 건축』 은 결국 저에게 행복'을' 건축해주었습니다.





  브런치에 처음 작성하는 글은 아무래도 저 자신을 소개하는 글이 돼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500일의 썸머》와 '알랭 드 보통'. 이 두 가지 저의 '가장 어떠한 무엇'이 앞으로 글에 어떤 생각이 담길지, 또 그 글들을 통해 어떤 열매들이 맺힐지 확실하게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운명적으로, 아니면 우연히라도 앞으로 이곳에 제가 남길 글들을 통해서 누군가 저처럼 이렇게 소중한 만남을 가질 수 있으면 더 바랄게 없을 것 같습니다.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고마운 것. 그게 영화든, 책이든, 음악이든, 아니면 사람이든.



"There is a light that never goes out" (해당 사진 및 커버 이미지 출처 : Daum 영화 포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