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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잉위잉 Aug 12. 2019

표류일지 #4. 가사노동

정신적 왼손잡이 続. 20190613.

#1 세 번째 여름


2017년 2월에 일본에 와서, 지금, 2019년의 6월은 일본에서 맞이하는 세 번째 여름이다. 첫 번째 여름은 도쿄의 맨션 1층에 살며, 개인 세탁기가 없어 빨래를 이고 지고 코인 빨래방을 드나들었다. 그러던 중에 양말의 짝을 많이 잃어버렸던 기억이 있다.  당시는 장마가 길고 비가 많이 왔기 때문에 덥다는 생각은 그다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두 번째 여름은 작년, 치바로 이사한 뒤에 맞이한 첫여름이자, 지금까지의 해외 생활 중에서 가장 괴롭고 힘들었던 시기. 관동 지역 전체가 기록적인 폭염으로 푹푹 쪘고, 아르바이트와 학교의 밸런스를 제대로 잡지 못하는 와중에 금전난을 겪으면서, 다니던 정신과 병원을 옮기기까지 했다.

자기소개서에 사용할 목적으로 제작하던 일러스트의 스케치. 폐기된 스케치지만 아쉬워서.

오늘 도쿄 그리고 치바 일대는 처음으로 30도를 넘겼고, 되었다.  


취업활동 중이다. 특히 5월은 느긋하게 무엇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여기저기 회사설명회를 다녔고, 그중에서 지원하고 싶은 기업이 생겨 그곳에 이력서와 작품집을 만들어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중에 무려 목요일-금요일 이틀간 4시간을 자는 기염을 토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물론 제대로 뭘 할 수 없게 되지만, 쓰러질 듯이 몸이 한번 기울어지는 현상과 글자를 쓰지 못하는 현상은 처음 겪어서 좀 두려웠다.


30시간 가까이 기상 상태였던 금요일엔 저녁 아르바이트까지 소화한 뒤 집으로 돌아와, 그냥 자면 될 것을 뭔가 서러운 기분이 들어 맥주를 한잔 마셨었다. 침대에 잠깐 앉아서 시계가 0시를 가리키는 걸 확인하고 '그럼 양치를 할까'하고 일어난다는 것이 그대로 잠들어버려서 다음날 오후 3시경에 일어났다. 15시간을 자고 일어났다. 그다음 날도 10시간 가까이 잤다. 주말의 절반은 잠으로 보내야 했고 그러지 않고서는 회복이 되질 않는다.



#2 가사의 괴로움


이렇게 작업이 쌓이고 시간에 쫓기다 보니 가사를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 확실히, 우울증을 앓기 시작한 이후, 주변정리를 잘 못하게 되었다. 치료 전후의 자취 생활이 크게 달라졌다. 대학생 때는 양푼에 가루세제를 풀어 행주를 삶고, 마른행주로 부엌을 닦고, 걸레를 손으로 빨라 집안을 윤이 나게 걸레질하는 걸 즐겼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우울증으로 가장 괴로웠던 1년간은, 그렇지가 못했다... 끔찍한 일들이 있었지만 굳이 쓰지는 않기로. 당시에 살던 방은 작으면서도 수납공간이 많은 풀옵션 원룸이었기 때문에, 눈에 거슬리는 물건은 수납장에 모두 때려 넣어 두거나, 가끔 약기운에 정신을 차려 끼니를 먹고 몸을 일으켰을 때 조금씩 천천히 치우며 살았었다고 생각한다.


물건을 치우다 보면 눈물이 난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난처한 기분에 절망을 느낄 때도 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 그리고 우울증을 앓는 사람에게 집을 깨끗하게 치우는 일은 단순히 청결한 생활 이상의 의미가 있는 일이다. 심리적으로 매우 큰 일이다.



#3. 전문가의 힘


6월 모일. 결국 일본에서 가사 도움 서비스를 받았다. 너무나 어질러진 방인 데다가, 괜히 '외국인이라 방을 함부로 쓴다'는 인상이라도 생기는 건 아닐까 싶어서 오전부터 일어나 주섬주섬 방을 치우고는 있었다. 서비스를 받기로 한 시간, 13시 정각이 되자 초인종이 울렸다. 나의 담당 하우스키퍼는, 세 아이들이 자라 학교를 가기 시작하며 한가한 시간이 늘어나자 하우스키퍼로 일하고 계신다는,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상냥한 인상의 일본인 아주머니.  


그간 어떻게 청소하는지도 몰랐던 일본식 욕실의 수채 구멍을 분리해 안쪽까지 청소해주셨고, 청소하는 방법도 알려주셨다. 괴롭게도 수채 구멍에선 시커먼 머리카락이 정말 한주먹이나 나왔다. 해맑게 웃으면서 '이제 깨끗해졌어요~'라고 하시는데, 고맙고 죄송하단 말만 거듭했다. '여자 사는 집인데 영 지저분해서 부끄럽네요'라고 거듭 사과했다.


"괜찮아요. 더 심한 집들도 많아요. 그리고 누구든, 사람이 살다가 바쁘면 미처 가사에 손이 닿지 못할 때(手が届かない)가 있는 걸요."


괜찮다고 나를 다독이며, 그분은 1시간 정도만에 욕실, 변기(욕실과 변기가 분리되어 있는 집이다), 싱크대의 청소를 마무리하셨다.


계약한 서비스 시간은 3시간인데, 1시간 만에 욕실과 변기와 싱크 청소(이 세 곳을 아울러 '물 닿는 곳:水周り'이라고 한다)를 끝내실 줄은 몰랐다. 나머지 두 시간은 정리정돈을 도와주셨다. 다만 컴퓨터와 책상 근처의 개인 사물은 내가 직접 정돈하기로 했기 때문에 빨래를 개켜 주시고 나서 냉장고를 청소해주셨다. 냉장고 속 식재료 하나하나 손에 집으며 일일히 '버릴까요?'라고 물어봐주셨다. 나의 식습관은 레토르트로 유지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우선 유통기한이 지난 것들은 다 버려주세요'라고 했다. 그러자 냉장고 속 사물의 절반이 사라졌다. 냉장고 안까지 꼼꼼하게 닦고 씻고, 전자레인지까지 닦아주셨다. 시간이 좀 남는듯하자 '음, 어느 곳을 더 정리하면 좋을까요?'하시면서 쓰레기 분리배출과 함께 베란다 새시, 창문, 현관까지 다 닦아주셨다.


'누가 우리 집에 왔다'라는 것, 그리고 '나의 청소를 돕고 있다'는 것, 특히 '내 집의 가장 지저분한 곳을 다른 사람이 청소해주고 있다'는 사실은 청소 진행의 큰 동력이 됐다. 어느샌가 나는 하우스키퍼님이 와 계시는 3시간의 청소 내내 한 번도 쉬지 않고, 어느덧 숨이 차도록 청소를 하고 있었다. 혼자서 캐비닛과 책장 위치를 바꾸고, 청소기와 세제와 물티슈, 걸레로 쉬지 않고 집을 닦았다. 특히 침대 밑에서는 잃어버렸던 겨울의 수면양말들을 가득 찾았다.


하우스키퍼는 같은 치바 현에 살고 계시는 분이었지만, 내 집보다 먼 시에서 오셨다. 날이 슬슬 더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차갑게 식혀둔 보리차 한병을 건네드렸다. 그 분은 '고객님들께 웃음을 전하고 싶습니다'라는 손글씨와 이름이 적힌 명함을 건네 주셨고, 서로 오지기(お辞儀.일본 사람들의 인사습관)를 하고서 가사 대행 서비스는 종료되었다.


깨끗해진 집을 뒤로하고 저녁식사를 사러 나갔다 들어왔다. 깨끗해진 집이 너무나 좋았다. 여전히 잡동사니를 좀 더 치워야 하지만, 하우스키퍼님의 손길이 닿은 집은 충분히 기분이 좋아질만큼 깨끗했다. 기분은 행동으로 이어진다. 저녁식사의 달걀 프라이 하나를 만들고 나서도 바로 가스레인지 주변을 닦고, 달걀 껍데기를 쓰레기봉투에 넣고, 먹고 난 식기는 바로 설거지했다. 설거지로 물이 튄 곳도 바로 닦았다. 샤워를 하고 나서는 흥건해진 주변의 물기를 다 닦고, 고무 헤라로 거울을 밀어서 물기를 싹싹 긁어냈다.


#4. 가사는 노동이다


언제부터 빨래는 저절로 개켜져 있고, 책장엔 먼지가 없는 생활이 저절로 유지된다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언제부터 이것이 저절로가 아니라 누군가의 노동력을 통해 이뤄지는 청결함임을 깨달았을까. 자취 8년 차, 그리고 우울증 치료가 4년에 접어들고 있다. 넓은 집에 살수록 그만한 집을 유지하고 감당할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가사에는-다른 여러 일도 마찬가지이듯-정신력과 체력과 기술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회는 가사의 기술, 가사에 들어가는 노동력을 너무나 사소하고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있다. 가사에 능숙하지 못한 것을 개인의 게으름으로 치부하거나, 특히 여성의 경우엔 사람의 자질 부족이라는 식으로 까지 말하며- 참 쉽고 간단하게 그 일을 격하시키곤 한다.


법정근로시간 기준은, '가족 중에 전업으로 가사를 담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전제하에 구성되는 기준이라는 말에 공감하고 있다. 1인 생활하는 직원이 '이렇게 야근하고 집에 가면 빨래 돌릴 시간이 없어서 입을 옷이 없어요'라고 하소연하자, 나이 40이 넘은, 부모와 함께 사는 상사가 '빨래 뭐 얼마나 걸린다고? 퇴근하고 밤에 돌리면 되잖아?'라고 해서 황당하였다는 일화를 들었다. 주말에 밀린 가사에 지쳐 겨우 겨우 빨래를 널고서 월요일에 출근하자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울적해져 있더니, 상사가 '젊은 사람이 주말엔 어디 놀러도 안 가고 집에만 있어서 그런다'라고 타박을 하더라는 것 또한. 자기 손으로 가사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세탁에 얼마나 시간과 노동이 필요한지도 모르고, 심지어 밤에 세탁기를 쓰는 것이 민폐인 줄도 모르는 것이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을 가장 실감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가사다. 저절로 빨래는 깨끗해지지 않고, 먼지는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집은 더러워지고, 나의 생활과 기분의 만족도도 점차 떨어져, 악순환의 고리로 떨어진다. 


#5.전문가


누군가의 문제를 능숙하게 해결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을, 우린 전문가라고 부른다. 가사도 일이고, 가사가 서툴러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이 있고, 가사에도 전문가가 있다. 가사는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야만 하는 일이다. 성별에 관계없이, 얼마나 오래 해왔느냐에도 관계없이 잘할 수도 못할 수도 있는 일. 여럿이서 해도, 오래 해도 여전히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일, 잘 모르겠거나 서툴 땐 잘하는 사람의 도움을 받기 위해 돈을 지불할 수도 있는 일. 어쩌면 회사에서 하는- 내 특기와 재능을 발휘해 수익을 창출해내는 그런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습관이 쌓여 생활이 되고, 생활이 모여 시간이 되고, 시간들이 엮어져 삶이 된다. 생활이 어긋나 있다면 다시 습관부터 쌓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어렵다면, 혼자서 헤매기보다는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아도 좋다. 어른이 되면 다 저절로 될 것만 같은, 아니, 다 할 수 있게 될 것만 같던 것들은 사실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것들이란 걸 깨닫게 된 건, 아주 최근의 일이다.


정신적 왼손잡이 続. Fin.

※에세이 <정신적 왼손잡이 続>는, 필자 위잉위잉이 2017년 3월부터 일본에 이주해 살며 생각과 일상을 정리해 늘어놓는 조용한 조각 글의 모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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