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빅피쉬’를 보고
“고슴도치 인형 루비가 밥 달라고 말을 한다고?”
“응. 그리고 밤에 잘 때는 나한테 잘 자라고 인사까지 해줘.”
“우와 진짜 신기하다. 우리 집에 있는 네티 요술봉은 버튼을 눌러야지 뾰로롱 소리가 간신히 나는데...”
집에 와서 아빠한테 짝꿍의 고슴도치 인형에 대해서 말했다. 아빠는 그런 인형이 어딨냐고 했지만, 난 철석같이 믿었다. 진짜 있는 인형이라니까? 나도 꼭 그 인형 갖고 싶어.
나는 고슴도치 루비에 푹 빠져있었다. 학교에 가면 짝꿍에게 쉬는 시간마다 물어봤다. 오늘 루비랑은 뭘 했어? 어디에서 그 인형 산거야? 네가 가진 인형만 특별한 거야? 너네 엄마는 루비가 말한다는 사실을 몰라? 너네 집에 놀러 가서 루비 한번 보면 안 돼?
물음표 살인마를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던 짝꿍은, 질린다는 표정으로 결국 진실을 토로했다.
미안해. 이거 다 뻥이야! 그냥 아무 말도 못 하는 고슴도치 인형이야.
실망감과 충격에 휩싸였다. 그 날은 '거짓말'이라는 단어를 온몸으로 느낀 최초의 날이 되었다. 유치원 선생님이 읽어주는 전래동화 이야기나, 동화책 속 인어공주 이야기와는 다른 차원의 '거짓말'이었다. 어리고 순수했던 나는 짝꿍에게 단단히 삐져버렸다. 쟤는 도대체 왜 저런 거짓말을 하는 거야?
거짓말을 수십 번 경험하고, 거짓말이 점점 익숙해진 나는 무럭무럭 자라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때 나는 유머러스한 말과 장난으로 친구들을 웃기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 반에서 제일 웃긴 애'라는 타이틀에 부응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애들이 어떤 포인트에서 웃는지 본능적으로 기억하고, 찬스가 오면 똑같이 써먹었다. 성공해서 애들이 웃으면 뿌듯한 감정이 차올랐다.
어느 날, 나의 등하굣길 메이트 친구 J가 주말에 경험했던 웃긴 썰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친구 J는 치명적인 단점을 갖고 있었다. 바로 갑분싸 재질. 잘 들어보면 웃긴 이야긴데, 다른 친구들 앞에서 말하게 되면 자기 혼자 웃고 나머지 사람들은 조용해지는 스타일... J가 말하기 시작했다.
"아니, 주말에 밥 먹으러 갔는데 식당 아줌마가 주차하셨냐는 거야. 내가 그래서 그 아줌마한테, 아닌데요? 저 아직 고등학생이고 주차 안 했는데요?라고 말했거든. 그래서~ "
이야기를 다 듣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저 재밌는 소재를 조금만 각색하면 진짜 빵빵 터질 텐데..
"야야. 얘기를 할 때 제일 재밌는 부분을 먼저 말하면 어떡해. 그러면 나머지 얘기에 집중이 안되잖아. 재밌는 부분은 마지막에 빵 터트려야 더 재밌어진다고."
이야기를 재밌게 말하는 방법에 대해서 일장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남 이야기를 듣고 섣부른 충고를 할 정도로 허세가 가득한 17세였다.(후회스럽다.)
충고를 들은 친구 J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참나, 야! 네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다고! 어차피 달라질 거 없는 같은 이야기잖아! 똑같은 거잖아!!"
주말에 팀 버튼 감독의 영화 '빅피쉬'를 보았다. 아버지 애드워드 블룸은 아들에게 판타지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만 계속 늘어놓는다. 이미 다 커버린 아들은 아버지의 이야기에 질려버리고, 진실을 말하라고 소리친다. 그러다 아들은 우연히 아버지가 자신이 태어난 날에 출장 중이라 병원에도 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제야 아버지가 왜 자신이 태어난 날에 강에서 큰 물고기를 잡은 이야기를 말하고 다녔는지 깨닫는다.
아버지는 미안하고 안타까운 사실을 말하는 것보다 아름답고 멋진 이야기를 아들에게 해주고 싶었을 거다. “너를 사랑해”한 문장을 아버지의 방식인 판타지로 길게 표현한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도 한 가지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거짓과 진실, 가짜와 진짜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야기를 하는 사람의 마음에 어떤 진심이 담겨있냐는 게 중요하다는 것.
나의 고슴도치 인형 이야기와, 친구 J에게 충고한 이야기 모두 본질은 같다. 초딩 짝꿍은 나를 속이려 거짓말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통해서 내가 즐거움을 느꼈으면 하는 순수한 마음이었겠지. 친구 J에게 충고한 나의 마음도 같은 마음이었다. J가 사실 재밌는 사람이라는 걸 다른 친구들도 알아주면 좋을 것 같다는 마음. 그 마음을 잘 보여주기 위해서는 판타지 같은 어떤 효과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의 나는 재수 없고 건방지게 말한 것 같다.
우선 친구 J에게는 늦었지만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다. 그리고 이 글 역시 독자의 재미와 감동을 위해 어느 정도 과장과 각색을 거쳤다는 사실을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