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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Oct 28. 2023

아무도 안 물어봐줘서 혼자 하는 셀프 인터뷰 #1

오랜만에 퇴근하고 인터뷰집을 읽는데, 질문 하나 답변 하나하나가 간결하면서도 인사이트가 넘쳐서 좋았다. 나는 언제 이런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는 사람이 될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누가 다가오길 기다리지 말고 그냥 셀프로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문도 셀프, 계산도 셀프, 모든 게 셀프인 세상에 인터뷰라고 셀프가 안 될 건 뭐람. 3분 만에 노트북을 키고 브런치를 열었다. (브런치, 그동안 안녕했는지..?)


잠깐 찾아보니 셀프 인터뷰를 주기적으로 하면 자기 자신을 잘 알 수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셀프 인터뷰는, 곤란한 질문 따위는 없고 내가 끝내고 싶을 때 끝낼 수 있어서 좋다. 그럼 가볼까. 이 시리즈가 언제 끝날지는 며느리도 몰라요.



Q. 하고 있는 일을 소개해 달라.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물어보면 참 곤란하다. 왜냐면 나도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 그제의 나는 계약서를 작성한다고 땀을 뻘뻘 흘렸고, 어제의 나는 학회에 참석해 교수님들과 담소를 나누며 관계를 쌓았다. 오늘의 나는 그냥 온종일 세일즈 콘텐츠를 작성하다가 퇴근했다.


그래서 진짜 무슨 일을 하냐고? 네. 저는 의료계 스타트업 '인티그레이션'에서 콘텐츠팀 Lead를 맡고 있는 한의사입니다. 라고 하면 어차피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매번 소개를 할 때마다 혓바닥이 길어진다. 어떤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는 대표라거나, 무슨무슨 크리에이터였으면 좋았으련만. 요약하면, 한의사들을 위한 강의를 만들고, 도서를 소개하고, 학회 행사를 유치하는 일을 한다. 의료전문직도 면허를 따면 땡이 아니라 계속해서 배워야 하기 때문에 사교육 시장이 있다. 나는 우리 회사에서 교육 파트를 맡고 있다.

최근 참석한 오프라인 학회


Q. 스타트업에 입사한 지 얼마나 됐나? 어떻게 시작했는지 궁금하다.


2년 전 처음 입사했다. 한의계 커뮤니티 내에서 이런 저런 목소리를 내다가, 같은 한의사인 지금의 대표님 눈에 들었다. 병원에 소속된 상태로 단기 프로젝트 1건을 같이 진행해봤고, 이후에 정식 오퍼를 받아 풀타임 근무자로 합류하게 되었다. 그때 했던 프로젝트는 별로 성과가 좋지 않았고, 면접 때 참석한 다른 2명은 반대 의견을 냈었다는데 내가 어떻게 합격했는지는 아직 나도 모르겠다. 대표님 왈 '자기랑 비슷한 거 같아서 그냥 감을 믿고 뽑았다'나 뭐라나. 그래도 지금 1년 반만에 팀장 하고 있는 걸 보면, 감이 나쁘시진 않은 듯.



Q. 입사 전엔 어떤 커리어를 거쳤나?

   

커리어라고 할 건 별로 없다. 공중보건의사로 강화도에서 3년 근무하고 한의원과 한방병원에서 각각 1년씩 있었던 게 전부라, 임상의로서 뭐 딱히 내밀만한 명함이 아니다.


다만 특이한 점이 있다면, 대학교 때부터 딴짓 하는 걸 좋아했다. 본과 1학년 때 캘리그라피를 배운 게 시작이었다. 부모님은 "아니 얘가 왜 뜬금없이 예술을 한다고 난리지" 하는 반응이셨다. 남들이 알아주는 유명한 예술이면 몰라도 붓이나 끄적거리자고 학원비를 달라고 했으니 그럴만도 하셨다. (그때는 캘리그라피가 뭔지도 잘 알려지지 않을 때였다) 그렇게 캘리그라피를 배워서 소규모로 작품 전시회도 열고 캘리그라피 일일 알바도 뛰고 했다. 그렇게 뭔가 '딴짓이 경험으로' 구체적으로 축적되고 이어지는 걸 느꼈던 게 시작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다양한 주제에 관한 독서와 함께 각종 예술 분야―도예, 가죽 공예, 마크로비오틱, 와인, 건축 등― 에 발을 걸치면서 취향과 시야를 확장했다. 그러다가 여기까지 오게된 게 아닌가 싶다.

요새 도예를 다시 시작했다


Q. 스타트업에서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있나?

내 장점은 광범위한 분야에 관심이 많고, 그 중 꽤 많은 분야에서 빠르게 두각을 보인다는 거다. 대학 때부터 관심사가 많았고 또 곧잘 성과를 냈다. 그런데 정해진 매뉴얼을 벗어나면 안되는 진료는 내게 너무 지루했다. 창의적인 일을 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무언가 아이디어를 내고 결과를 봐야하는 성격이 더 잘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이 진료실 밖 어딘가에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 좋은 기회가 왔고 '그냥 해!' 정신으로 시도했다. 아직까지 만족하고 있으니까 됐다. 진료할 때보다 돈은 훨씬 적게 벌지만..



Q. 스타트업과 병원, 뭐가 가장 다른지?


아픈 환자 또는 질환이 하나의 프로젝트라고 한다면, 아주 개빡치는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겠다. 그 프로젝트가 내 손에서 시작했을리 없고(환자는 한참 아프고 나서 병원에 온다), 또한 온전히 내 손으로 끝맺는 일도 잘 없다(환자는 자기가 좀 괜찮아졌다고 생각하면 안 와버린다). 심지어 감도 안 잡히는 프로젝트도 많다(세상에는 정말 다채로운 환자들이 많다).


그러나 회사는 프로젝트 단위로 계속해서 돌아간다. 내가 시작한 기획이 나의 눈 앞에서 어떤 실체를 가지고 이 난다. 그것이 어떤 처참한 결말일지라도 말이다. (그렇다고 환자와 처참한 결말을 맺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배운다. 온전한 프로젝트가 나에게 맡겨질 수 있는 환경이 가장 다르다고 생각하고, 가장 만족하는 부분이다.

최근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Q. 스타트업 생활에서 도움되는 덕목이 있다면?


내가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고 자랑할 만한 취미는 오직 '독서'다. 독서에서만큼은 잡식성 대식가라고 말할 수 있다. 왕성한 독서 습관 덕분에 텍스트와 (남들보다) 친밀한 편인데, 그게 꽤 도움이 된다고 느낀다.


특히 글을 다루는 능력은 글에만 국한된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일을 하면서 깨달았다. 과장 조금 보태서 글쓰기는 모든 업무 능력의 기반이 된다. 예컨대 디테일을 알아보는 감각과 스토리를 만드는 기획력은 글에서 비롯한다.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고 내 것으로 만드는 흡수력이나, 완전히 다른 분야를 연결해서 답을 찾는 창의력과도 연관이 있다. 협업할 때 가장 중요한 설득력 전달력에도, 이해력에도, 협상력에도 다 글에 실마리가 있다. 그래서 나는 내 같이 일할 팀원 면접을 본다면 (아직 면접을 본 적은 없다), 독서량과 독서 스타일 같은 걸 물어볼 것 같다. 하지만 긴 텍스트를 즐기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하니..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앞서 가고 있는 겁니다.

요새 읽는 책은 책에 관한 책이다



Q.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새 커리어적인 고민이 있다면.


있다. 사실 많다. (다음 편에 계속)




최근에는 입사 지원한 한의사 선생님과 간단히 화상 통화를 했고, 얼마 전에는 스타트업에 도전하고 싶어하는 의사 선생님과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쓰다보니까 그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아니면 그들이 궁금해할만한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이전에 썼던 글들 자기복제 수준이긴 하지만.. 도움이 되셨다면 좋겠습니다. 확실히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전문직들이 다른 커리어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럴 때면, 나는 어쩌면 남들보다 조금 빠르게 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며 스스로가 기특하다는 생각도 한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개원한 친구들은 돈을 많이 벌고 있겠지. 몸은 고되도 등은 따숩고 통장 잔고는 계속 불어나겠지. 으으. 배아파. 아으윽. 다음 인터뷰에서 뵙겠습니다. 저의 정신승리는 계속됩니다.


(202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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