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ore Jan 05. 2024

2023 TMI 어워드

각설이처럼 새해는 또 왔다. 시간 가는 속도는 왜 이렇게 빠른지. 이젠 빠르다고 하기도 지친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보험으로 이행시 해보겠습니다. 보 : 보험은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 험 : Hmmm..

올해의 실패 - 보험 가입


스물 여섯이었던가, 병원 문턱에도 가지 않는 나이때는 유독 보험금이 아까웠다. 한번도 청구한 적 없는 실비보험과 나에게는 너무 멀었던 암/뇌질환/심장질환 진단비 보장 보험. 나는 엄마가 꾸역꾸역 유지해주었던 보험을 단칼에 해지해버렸고 시간은 흘렀다. 점점 중증질환 발병 연령은 내려가고, 혈압은 점점 올라가고. 건강검진을 앞두고 생각이 많아지는 나이가 되었다. 아, 보험 해약하지 말걸.


이제와서 후회하면 무엇하리, 다시 내가 직접 보험을 가입하기로 했다. 알아야 할 것도 많았다. 갱신형은 무엇인지 비갱신형은 무엇인지. 20년을 납입한다면 80세 만기가 좋을지. 90세 만기가 좋을지. 일부러 어렵게 해놓은 듯한 보험 약관들을 살펴보고 있자니 오히려 상념에 빠지게 됐다. 나는 언제까지 살까. 그때 세상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그때 나는 어떻게 적응해 있을까. 그렇게 또 보험사이트를 기웃거리다가 혼자 멍 때리다가를 몇 번 반복하다, 결국은 아직도 결정을 못 하고 있다. 늘그막에 아픈데 돈까지 없으면 서럽다고 하니까 보험은 꼭 들 예정이다. 1월 안엔 반드시 들어야지. 근데 진짜 귀찮아 죽겠다. 귀찮음으로 사망할 위험에 빠진 사람을 위한 보험 추천 좀.



올해의 소비 - mx keys mini


하루 24시간 중 손가락이 가장 많이 닿는 물건이 무엇일까? 스마트폰? 틀렸다. 거기에 닿는 건 고작 2개의 엄지 뿐이다. 정답은 '키보드'다. 키보드에는 10개의 손가락이 거의 매 순간 붙어있다시피 하거든. 당신이 사무직 직장인이라면 말이다.


물론 기본으로 회사에서 제공하는 키보드가 있다. 그것도 나쁘진 않지만 늘 조금 부족한 감이 있었다. 손 끝 감각이 예민한 사람은 안다. 좋은 키보드에선 새 농구공을 튀길 때의 경쾌한 손맛 같은 게, 떡메를 칠 때의 찰기 같은 게 느껴진다. 회사 키보드를 참고 쓰다가 2개 째 망가졌을 때 (일부러 뿌신 거 아님) 비로소 결심했다. 새 키보드를 사야겠다. 나에게는 경쾌한 일상을 누릴 자유가 있다. 개떡같은 세상에 찰떡같은 키보드 정도는 사치가 아니다. 이 정도면 새 키보드를 살 근거는 충분했다.


고심 끝에 고른 제품은 Logitec의 Mx Keys Mini다. 컴팩트하면서도 약간의 무게감이 있고 키감이 아주 쫄깃쫄깃한 것이 특징이다. 소음이 크지 않은데다가 눌렀다가 뗄 때 적당한 반발력으로 손 끝에 맺히는 느낌이 아주 인상적이다. 역시나 특별한 키보드인만큼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7만원. 누가 숫자판도 없는 키보드 따위에 7만원이나 쓰냐고. 하지만 어떤 순간이 있다. 아무리 해도 절대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나는 이제 평범한 키보드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날 가져요 로지텍. 헉헉.




올해의 공간 - 정선 파크로쉬


관광단지와도 가깝지 않고 찾아가기도 어려운 강원도 정선군 산골짜기에 달랑 리조트 하나가 있다. 바로 파크로쉬 (PARK ROCHE Resort & Wellness). 무슨 배짱일까 싶은데, 그 배짱이 맘에 들어 점찍어둔 곳이다. 벼르고 벼르다 올해 9월, 2박 3일로 다녀왔다.


결론은 상상 이상으로 대만족. 처음 방에 들어간 순간부터, '여기 또 와야겠다' 라고 다짐했다.


널찍한 킹베드 룸과, 탁 트인 가리왕산 전망. 우디한 시그니처 향기와 시트러스의 바디워시 향. 투숙객들을 위한 요가나 명상 클래스부터, 하루 종일 재즈가 나오는 음악감상실, 불멍을 온종일 때릴 수 있는 마당의 캠프 파이어까지. 컨셉부터 소품까지 전부 내 취향이었다. 혹시 민간인 사찰을 통해 내 취향을 옮겨놓은 게 아닐까? 아니면 파크로쉬 디렉터가 숨겨진 나의 쌍둥이 형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파크로쉬 주식이 있었으면 샀을 겁니다. 인간들에게 지친 직장인에게 한 줄기 빛 같은 휴식 공간. 쉼을 원하는 분들께 강추입니다. 참고로 휴가 다녀와서 하도 자랑했더니 팀원들이 바로 다음주에 다녀옴.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은, 마침 날이 흐려서 별을 못 봤다는 점. 그래도 괜찮다. 쏟아지는 별까지 봤다면 진짜 안돌아오고 경희 파크로쉬 한의원 차렸을지도 모르니까. 매일 밤 일정 시간에 소등하고 옥상에서 별을 감상할 수 있는 타임이 있다고 하니 가실 분들은 참고하세요.




올해의 도전 - 결혼식 사회


한 해를 시작하기 전에 1년 동안 이루고 싶은 것들을 적는 '버킷리스트 yearly bucketlist' 리추얼을 몇 년 째 계속하고 있다. 적다 보면 망상에 가까운 희망사항도 적곤 하는데, 2023년 초에는 무슨 바람이 들었던지 <결혼식 사회 보기>를 적어두었더랬다.


사실 나는 '말하기'에 컴플렉스가 있다. 약간 어눌한 발음과 너무 낮은 목소리, 그에 반해 경박한 웃음소리 같은 부분이 맘에 안 든다. 그래서 스피치 코칭도 받아보고 남몰래 신문을 소리내어 읽으면서 발음 교정을 하기도 했다. 의식해서 말할 땐 이제 좀 나아졌다 싶은데, 편한 사람들과 있으면 여전히 푼수 그 자체다.  


그런 내게 결혼식 사회는 큰 도전이자 꿈이었다. 그래서 언젠간 한번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으로 적어두었는데 웬걸, 친한 친구 녀석이 결혼식 사회를 봐달라고 하는 게 아닌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마음으로 바로 수락했다. 사실 별로 떨리진 않았다.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그간 연습을 꽤나 해두었거든.


몇 번의 입장과 몇십 번의 박수 유도를 하고, 정해진 대본대로 잘 마쳤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 결혼식이 이렇게 빨리 끝나는 행사인 줄 몰랐다. 그렇게 오래 준비하고 돈도 이렇게 많이 드는데 말이다. 내가 너무 말을 빨리 한 건가. 아니면 빨리빨리 민족의 문제인가. 나의 원초적 고뇌는 행복한 그들이 신혼여행을 다녀올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아- 결혼식이란 무엇인가.


오홍홍 칭찬 받았다




올해의 문장 - "네 덕, 내 탓"


고깃집에, 그것도 아주 시끄러운 소고깃집에 붙어있던 네 글자 현판. 네 글자만으로도 울림이 커서 내가 특별히 덧붙일 감상이 없다. 저 글자들 위에, 1g도 손해보기 싫어서 아등바등하던, 내 맘 편하기 위해 남 핑계를 대던 못난 내 모습들이 겹쳐지곤 했다. 새해에도 꼭 기억하고 싶어서 2024년의 단어로도 새겨두었다. 나는 앞으로 조금은 흐리멍텅하게, 약간은 실없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밖의 올해의 문장 후보들>

-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깊게, 깊은 것을 유쾌하게

- 젊음은 주어진다. 늙음은 이루어진다.

- 목표가 아니라 경주 자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즐거움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추구하는 데 있다.




어째나 저째나 2024년은, 안 올 것 같던 서른 두 살은 왔다. 점점 물가는 오르고, 부동산은 떨어지고, 비트코인은 꿈틀대고(살 걸), 매일매일 뉴스는 기상천외하고, 세계는 점점 큰 폭으로 요동하는 느낌이다. 내 안에서 점점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들도 희미해지고, 세상이 나를 상대로 개꿀잼몰카를 하는 것 같은 아득한 느낌도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앞으로 가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으면 좋겠다. 나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이런 불확실성 속에서도 잘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올해는 글 열심히 쓰겠다는 뻥은 안 칠게요. 적당히 쓰고 싶을 때 (하지만 즐겁게) 쓰겠습니다. 늦었지만 해피 뉴 이어.


(2024.01.0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