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블스 플랜 시즌 2 : 데스룸> 리뷰 (feat. 2025 대선)
주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평소 예능엔 관심 없는 나지만, 서바이벌 프로그램만큼은 놓치지 않고 챙겨 본다. <더 지니어스>가 그랬고 <피의 게임>이 그랬고 <데블스 플랜>이 그랬다. 이번에도 부푼 기대를 안고 정주행 한 <데블스 플랜 시즌 2 : 데스룸>. 파이널이 공개된 뒤로 출연자 및 프로그램 완성도에 대한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는다. 나도 거기에 한 마디를 보태려 한다. 물론 비난(을 최대한 억누르고)보다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솔직히 아쉬운 점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운영 디테일이나 게임 선정 이슈는 차치하고서라도, 일부 출연자들의 모순적인 행동이 크게 몰입을 방해했다. 내 연합이 누군가를 따돌려서 떨어트리는 건 괜찮지만 내 연합의 누군가가 따돌림으로 떨어지는 건 '정의롭지 않다'라고 핏대를 높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우승이 목적인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와서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이 우승하길 바란 이도 있었다. (후.. 덕분에 나는 결승은 스킵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속수무책으로 감정에 휘둘린다. 때론 엉뚱하고 후회스러운 실수를 한다. 자기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해 내로남불이 일상이다. 그렇게 평범하게 초라하고 평범하게 어리석은 인간들이 모여 구성하는 것이 사회다. 그런데 시청자들이 화딱지가 나는 포인트는 하나다. 우리가 원한 건 두뇌 싸움이지, 사회 실험이 아니야.
데블스플랜은 하나의 거대한 세트장에서 일주일간 합숙하며 게임을 하고 우승자를 가리는 서바이벌이다. 룰은 간단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승리할 것’. 폭력과 절도를 제외한 어떤 행동도 용인된다. 사기, 배신, 정치, 음해공작, 권모술수가 난무한다. 승리하지 못하면 탈락한다.
그런 점에서 최종 우승자가 현규인 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는 이 게임의 룰을 가장 빠르게 이해하고 적용한 사람이다. 초반부터 (호감형 외모를 바탕으로) 굳건한 연합을 만들고, 타인을 속이는 걸 주저하지 않으며, 명분보다는 실리를 택하고, 유력한 경쟁자를 단체의 힘을 빌려 제거하고, 타인의 감정을 건드려 위기를 극복하고, 등등. 그야말로 우승만을 위해 능수능란하게 플레이해 온 인물이다.
그런데 많은 시청자들이 우승한 그에게 박수를 보내지 못했던 것은, 오히려 그가 게임의 룰을 너무 잘 이해하고 실천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승리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그 어떤 것도 용서된다'는 데블스플랜의 룰이자, 냉혹한 사회의 룰을 말이다.
현실에서 우리는 승리만큼 커다란 가치는 없다고 교육받는다. 모두가 속삭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를 쟁취하라고. 어제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던 이를, 오늘 내 손으로 떨어트려도 된다고. 결국 이기기만 하면 된다고. 모두가 승리자와 승리 그 자체를 우상화하며 외친다. “편법도 실력이고, 부모 빽도, 운도 실력이야.” 그야말로 경쟁이 일상화된 거대한 데블스플랜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봄날, 나는 대학생들 몇몇과 함께 캠퍼스 기슭의 숲을 거닐었다. 숲에는 아름다운 야생화들이 만발해 있었지만 그 야생화들 중에서 어느 것 하나의 이름이라도 제대로 아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하기야 그런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꽃 이름 따위를 알아봐야 돈벌이에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을 텐데.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또한 어떤 개인이 단독으로 막아낼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이 문제는 삶이란 승자만이 존경받는 승부요, 경쟁이라는 일반화된 생활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감성과 지성을 포기하고 의지만을 지나치게 키우는 결과를 불러온다.
<행복의 정복>, 버트런드 러셀
게임 속 현규는, 사회에서 마주친 적 있는 어떤 이들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정보는 숨긴 채 남의 정보를 취하려 하거나, 단체의 도움으로 얻어낸 이득을 독식하고 (히든 스테이지 ‘기사의 여행’), 다수에 속해 소수를 따돌려 탈락시키고 (6화 ‘핼러윈 몬스터’) 거침없이 남을 도발하다가도 탈락 위기에선 감정에 호소하는 등 (9화 ‘균형의 만칼라’) 이른바 ‘목적이 최우선인’ 소시오패스 종합 선물 세트를 보여준다. 현규의 우승은, 마치 “거봐. 정의감이니 의리니 하는 건 필요 없어. 이기는 게 장땡이야”라고 우리 사회에 확정 판결을 내리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나는 화가 났다. 이런 사회에서 평생 살아온 우리가, 게임에서까지 그 꼬라지를 봐야겠냐고.
이런 시각에서 웃겼던 점 하나. 현규는 악행(?)을 마주할 때마다 '나가서 잘해주면 되는 거 아냐?'라고 말한다. 마치 게임과 현실을 분리하려는 듯이. 이쪽 세계의 자신과 저쪽 세계의 자신이 엄연히 다르다는 걸 누군가에게(혹은 자신에게) 설득하려는 듯이. 하지만 지켜보는 우리는 알고 있다. 분리될 게임과 현실은 없다. 그것은 애초부터 같은 룰을 공유하고 있었으므로.
사실 '현규'라는 인물은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우리 사회 속 승자에 대한 메타포. 과정이 어찌됐건 승리하기만 하면 된다는, 천박한 목적지향 사회의 메타포. 현규를 욕하는 마음 이면에는, 사회에 대한 울분이 숨어 있다. 승리만을 추앙하는 사회. 비교 우위가 목표인 사회. 당연하게 계급을 나누는 사회. 낭만을 사치라 여기는 사회. 선의를 얕잡아보는 사회. 연민을 나약함으로 내려치는 사회.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며 사는 것이, 낭비라고 말하는 사회를 말이다.
품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자기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옳을 수 있을 때, 그래서 선함the good과 옮음 the righteous이 하나가 될 때 생겨난다.
<가장의 근심>, 문광훈
그리하여 과몰입한 시청자들은 따진다. 마지막까지 의리와 스타일을 지켰던 세븐하이가 승리하는 결말은 없었느냐고. 따뜻한 인간미를 보여줬던 강지영이 우승하는 결말은 없었느냐고. 순수하게 승부 그 자체를 즐겼던 이세돌이 더 오래 즐거워하는 결말은 없었느냐고.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느냐고. 이른바 (현실에서 잘 볼 수 없는) 정의롭고 통쾌한 승리는, 왜 여기서조차 허용되지 않는 거냐고. 그런 투정을 쏟아내는 게 아닐까 싶다.
제작진도 마찬가지로 아쉬웠을지 모른다. 세돌의 너무 이른 탈락에 아차 싶었을 것이고 소희와 규현의 돌발 행동에 좌절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제작진은 처음 판을 까는 역할일 뿐 서사는 출연자 개개인에게 달렸다. 모든 신을 철저히 통제하는 드라마/영화 제작과는 달리, 리얼리티 특성상 계속 변수에 노출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야기가 흘러간다. 한번 흘러가기 시작한 이야기는 그 안에서 계속 변화무쌍하게 춤춘다. 이야기 밖의 그 누구도 어찌할 바가 없다. 우리의 삶과 현실 사회가 그렇듯이.
하지만 훈수를 두기는 쉽다. 이 게임의 규칙은 뭐가 문제고 저 게임의 타이밍은 여기가 아니고 누구누구는 이렇게 행동했어야 했고. 물론 완성도를 높일 방법은 더 있었겠지만, 모든 건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기획을 업으로 하는 입장에서 그런 말처럼 듣기 싫은 게 없다) 모든 걸 전지전능한 시청자 시점에서 보니까 선명해 보일 뿐, 모든 서사와 변수는 예측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인간은 안갯속을 나아가는 자다. 그러나 과거의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 되돌아볼 때는 그들의 길 위에서 어떤 안개도 보지 못한다. 그들의 먼 미래였던 그의 현재에서는 그들의 길이 아주 선명해 보이고, 펼쳐진 길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되돌아볼 때, 인간은 길을 보고, 나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잘못을 본다. 안개가 더 이상 거기에 없다. (...)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수 있다. 누가 더 맹목적인가? 레닌에 대한 시를 쓰면서 레닌주의가 어떤 귀결에 이를지 몰랐던 마야코프스키인가? 아니면 수십 년 시차를 두고 그를 심판하면서도 그를 감쌌던 안개는 보지 못하는 우리인가?
밀란 쿤데라
현규와 일부 출연자들에 대한 과한 비난도 우려된다. 용두사미로 끝난 게 너무나 아쉽지만, 모든 책임이 그들에게 있는 건 아니다. 우리는 편집된 영상만을 볼 뿐,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일주일을 보내지 못했다. 아마 카메라가 미처 포착하지 못한 감정선이 있고, 그들의 입장에선 (그 당시엔) 결코 헤아릴 수 없었던 인식의 사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인간은 결코 합리적인 선택만을 하는 존재가 아니다.
만약 당신이 울분을 느끼는 대상이 '정현규와 그 패거리'가 아니라, 그들로 대변되는 사회 현상에 가깝다면, 한 가지 방법은 있다. 곧 있을 대선에서 투표하는 것이다. 우편으로 온 선거공보도 안 열어 보면서 댓글로 욕하기 바쁜 사람들은.. 좀 반성해야 한다. 당신의 손가락은 손가락질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그나마) 더 낫게 만들 누군가를 뽑으라고 있는 것이니까.
<데블스 플랜 시즌 3>이 나온다면, (이미 현실에서 너무 많이 봐서 지겨운) 패거리들의 정치판이나 계급 투쟁이 아니라 치열한 두뇌 싸움으로 돌아오길 바라며. 이상 리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