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 부러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열심히 준비해 발표 장소에 올랐는데 예상치 못한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도 모르겠고 어버버버 뚝딱뚝딱거리다가 결국 말아먹고 내려오는' 우리네 대학교 ppt 또는 면접 등을 충실하게 고증했다고 호평이 자자하다. SNL 인턴 기자 역의 주현영 배우는 본인의 연기력을 단 하나의 캐릭터로 증명해 극찬을 받고 있다. (저 과하게 힘이 들어간 눈동자를 보라) 실제로 저런 성격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였으니.
나는 사실 이런 류의 수치심 유발 코미디를 잘 보지 못한다. 왜냐면 나도 언젠가는 저런 적이 있기 때문. (나는 학창 시절 때부터 내성적인 편이어서 남들 앞에 나서는 걸 몹시 두려워했다) 가끔은 그런 걸 보면 눈물이 찔끔 나기도 한다. 혹자는 이를 두고 '공감성 수치'라고 부르는데, 자신의 수치심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과한 공감대가 형성돼 마치 자신이 당한 것처럼 수치심을 느끼는 경험을 일컫는다. 공인된 심리학적 용어는 아니지만 아주 중요한 개념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나는 영화 <완벽한 타인>도 매우 괴롭게 봤을 정도로 중증 공감성 수치 증후군 환자다.
그러나 최근 이 영상을 두고 '여혐 논란'이 번지고 있어 아주 어질어질하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글이나 댓글을 읽어보니 일단은 나와 어느 정도는 비슷한 감정을 느낀 듯싶다. 부끄러움, 수치심, 두려움, 조급함 등등. 그런데 그들의 주장은 한 발짝 더 나간다. 그런 감정들을 자주 느낄 수밖에 없었던 젊은 여성들의 상황에 집중해야 한다는 얘기. 젊은 여성들이 왜 명랑함을 연기하게 된 건지, 젊은 여성들이 난처함 앞에서 왜 울먹이거나 멘붕할 수밖에 없었는지, 젊은 여성들은 왜 하필 꽉 막힌 발성과 어색한 태도를 가지게 되었는지, 기저에 깔린 사회적 맥락을 살피지 못해 매우 불편하다는 논조다. 특히 젊은 여성들의 비하에 사용되는 '오또케' 프레임이 내재되어 있다는 주장은.. 뭐랄까, 좀 많이 삐딱하게 다가온다.
어떤 이는 SNS를 통해 공개적으로 불편을 드러내면서, "남성에 비해 여성들이 더 강한 사회적 압력을 경험하면서 능청스럽거나 뻔뻔해지기 어렵다"라고 주장한다. '어떤 자리에서 긴장하고 눈치를 과도하게 보는 이들'은 늘 여성이라는 논지다. 내성적이라고 놀림받고 여자 앞에서 쭈뼛거린다고 놀림받고 술 못 마신다고 놀림받았던 입장으로서 공감하기 어렵지만, 내가 경험한 세상이 전부는 아니므로 그렇다고 치자. 그는 이어서 주장한다.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20대 여성의 사회 말투나 당황한 모습을 보여주는 영상이라면, 일반적으로는 그것을 지적하거나 호통치는 상대방에 이입해서 영상을 보게 된다." 글쎄. 유튜브 댓글을 보면 대부분이 예전 자기 모습이 떠올라 고통스럽게 봤다는 의견이 대부분인데. 물론 남녀 통틀어서 말이다. 이런 주장을 한 분은 아마 '공감성 수치'에 대한 경험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분께 한 가지 알려드리고 싶은 부분. 인간은 가학적인 장면에서 강자에게 이입하도록 설계된 존재가 아니다.
유튜브 댓글 캡처
내 생각은 이렇다. <인턴 기자>의 다소 미숙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결코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호통에 주눅 들거나 남들의 눈치를 보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건 그냥 '넘치는 의욕에 비해 여유가 따라주지 않는' 모든 초심자에게 해당되는 쪽팔린 기억들 중 하나일 뿐이다. 뻗지 못하고 말려 들어가는 목소리, 짧아지는 호흡 탓에 자꾸 먹히는 발성, 숨기려고 해도 숨겨지지 않는 미세한 떨림. 자연스럽게 제스처를 취해보지만 세상에서 제일 부자연스러운 자신을 발견했을 때나,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거나 혹은 명백한 실수를 깨달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감각까지. 그런 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 밥벌이라도 해 먹고 사는, 평범한 남녀들의 평범한 추억 같은 것이란 말이다. 이런 소중한 기억을 사회적 약자 뭐시기 프레임으로 독과점하려고 하면 매우 곤란하다. 그런 기억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특히. (사실 요즘도 당황하면 가끔 말을 더듬고 그런다 흑흑)
나는 되묻고 싶다. 여자라고는 생전 만나본 적 없는 20대 새내기 남자 대학생의 첫 소개팅을 희화화했다면 어떨까. 말 끝마다 흐려지거나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남자, 괴상한 유머를 싸지르고는 혼자 킥킥대면서 웃는 남자, 아니면 백지장이 되어 음식 주문은커녕 질문에 대답도 제대로 못하는 남자들을 유머의 소재로 갖다 썼다고 치자.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데이트 상황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여성들 앞에서 작아질 수밖에 없는 20대 남자에 대한 조롱? 젊은 남자들에게 유독 차갑고 냉혹한, 기울어진 소개팅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부적절한 패러디? 그런 거 없다. 그냥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이고, 그게 유독 쓰라린 사람은 그런 재현을 보기 힘들 뿐이다.
물론 불편을 제기하는 구성원들에 의해 사회는 다듬어지고, 실제로 예전에 비해 세상이 훨씬 다원적이고 유연해져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점에도, 더 많은 구성원들이 더욱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는 점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이번 논란에선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어려운 콘텐츠 만드는 일이 더 힘들어지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는 부분이다.
아마 주현영 배우를 포함한 SNL 제작진들은 '인턴 기자'의 모습을 그려내고 연습하고 세상에 선보이려고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실제 인턴처럼 떨었을지 모른다. 나는 그들이 이런 논란으로 기죽지 않고 더 많은 콘텐츠를, 더 적극적으로 생산해 주기를 바란다. 혹시 이 글에 대한 생산적인 지적? 반박? 뭐 암튼, 해주신다면 감사합니다.
(2021.09.15)
이승한 칼럼니스트의 페이스북 글을 첨부한다. '젊은 여성이 대변할 수 있는 연기의 범주가 여성에게만 국한되는 건 아니'라는 요지에 매우 공감한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을 훨씬 유려하고 깊이있게 정리하면서 새로운 지점에서 확장시키기도 했다. 글을 잘 쓰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 샘이 난다. 꼭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