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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P.> 리뷰 : 그는 왜 방아쇠를 당겼을까

<D.P.>와 <모멸감>

by core


장안의 화제인 넷플릭스 시리즈 <D.P.>. 휴일 저녁 무심코 1화를 틀었다가 홀린 듯 6화까지 한 번에 봤다. 빈틈없는 전개, 입체적인 캐릭터, 거기에 숨을 불어넣는 배우들의 열연, 마지막으로 빼어난 만듦새까지.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군대라곤 4주의 훈련소가 다였던 나도 엄청 몰입해서 볼 정도였으니. 그러나 완결을 본 뒤엔 뭔가 씁쓸한 뒷맛이 남았다. 내가 본 것은 과장이 아니라 틀림없는 현실이었으므로.


주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사연의 군인이 등장하지만, 사실 드라마의 초점은 처음부터 조석봉 일병(조현철 분)에게 맞춰져 있었다. 사람을 때리는 것이 싫어 유도를 그만뒀을 정도로 착하디 착한 그. 온갖 괴롭힘 속에서도 후임 안준호(정해인 분)를 직접 챙길 정도로 따뜻했던 그. 그런 그가 만화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군 입대 후 '오타쿠'로 불리며 온갖 가혹행위를 당한다. 폭행과 구타는 기본이고, 모욕, 조롱, 성적인 굴욕까지. 그러다 어느 야간 근무 중 선임의 지나친 구타를 참지 못한 그는 홧김에 반격을 하고, 그 길로 탈영을 하고 만다. 어차피 이렇게 꼬인 거 자기를 가장 악랄하게 괴롭힌 주범 병장 황장수(신승호 분)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을 먹는다.


그렇다면 '간디'에 비견되던 조석봉 일병을 벼랑 끝까지 내몬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다. 바로 '모멸감'이다. 김찬호 교수의 저서 <모멸감>을 통해 석봉의 감정을 다시 뜯어보았다.

'모멸은 인간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내준다 해도 반드시 지키려는 그 무엇, 사람이 사람으로 존립할 수 있는 원초적인 토대를 짓밟는다. 그런 처지에 몰리면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가장 밑바닥에 떨어졌다고 느끼면서 자신 또는 남을 죽이고 싶은 충동마저 일어날 수 있다.'

드라마는 조석봉 일병이 모멸감을 느끼는 지점을 다양한 각도에서 비춘다. 대체로 황장수 병장과 다른 선임들에 의해 자행된 신체적 괴롭힘이 대부분이다. 한밤중에 불러내 얼차려를 주거나, 음모를 라이터로 지지는 고문, 자기가 보는 앞에서 수음을 강요하는 등의 가혹행위들. 한 번만 겪어도 평생의 트라우마가 될 만한 고통을 그는 몇 번이고 겪는다.

'일상생활에서는 모욕과 모멸이 거의 동의어로 쓰이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 모멸은 '모욕'과 '경멸'(또는 멸시)의 의미가 함께 섞여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모욕은 적나라하게 가해지는 공격적인 언행에 가깝고, 경멸 또는 멸시는 은연중에 무시하고 깔보는 태도에 가깝다. 모욕에는 적대적인 의도가 강하게 깔려 있는 반면, 경멸에는 그것이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모욕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무심코 경멸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모멸은 후자의 가능성까지 포함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멸은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멸감은 단순히 모욕적 상황에서만 비롯되지는 않는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무심코 일어나는 경멸 역시 모멸감의 큰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다른 분대원들, 자신을 놀리는 선임의 조롱에 웃음을 참지 못하는 동료들, 괴롭힘을 뻔히 보고도 모른 척하는 상급자들 속에서 석봉은 매일같이 은밀한 멸시와 배제를 느꼈을 것이다. 일상에 만연한 모멸감을 먹고 피해의식과 분노는 계속 자라났을 것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씬이 있다.


황장수의 지시로 한밤중 신병들에게 얼차려를 주는 석봉. 그러나 우리도 많이 맞지 않았냐며, 이런 짓은 대물림하지 말자고 만류하는 후임 준호. 급기야 그는 석봉의 앞에서 신병들을 돌려보내고 만다. 자신의 권위가 후임에게도 짓밟혔다고 느 석봉은 (그렇게 살갑게 대하던) 준호에게도 심한 욕설을 쏟아낸다.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얼굴이 되어. 그 후 한참이 지나 탈영한 자신을 잡으러 온 준호와 대치한 석봉. 육탄전을 벌이는 와중 살기를 띤 눈으로 묻는데. '너도 내가 병신으로 보이냐?'

정보 : 좌) 배우 신승호(95년생, 미필) / 우) 배우 조현철(86년생)


한편,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이런 이야기를 한다.

(...) 사람의 정신을 파괴하는 것은 자신이 맞는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에 반해 굴복한다는 느낌 그 자체이다. 고문 피해자 분이 끝까지 털어놓는 것을 망설였던 기억이 뭔지 아느냐. 고문자들이 그분을 실컷 때린 후에 "나 담배 피우면서 쉬는 동안 노래나 불러봐라"라고 했단다. 그분은 그때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노래했는가를 털어놓으면서 괴로워했다. 그분에게 가장 큰 고통은 심한 구타가 아니라 굴종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 자신이었다. (...)

끝까지 석봉의 정신을 갉아먹은 것은 그런 경험들이었으리라. 강요에 의해 아무것도 모르는 신병의 뺨을 때리는 자신. 바지를 내리라는 선임의 요구에 익숙하게 응하는 자신. 병장의 외침 한 마디에 아주 재빠르게 구타당할 자세와 위치를 잡는 신. '굴종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 자신'을 늘 거울 속에서 발견하면서 천천히 병들어갔을 것이다.


극 중에서 우여곡절 끝에 황장수를 납치한 석봉은 그에게 묻는다.

"..나한테.. 왜 그랬습니까..?"

그에 대한 황장수의 답이 석봉을 더욱 롭게 한다.

"그냥..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




국방부는 '군대는 많이 바뀌었고, 이제는 전과 같지 않다'는 투로 입장 표명을 했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해군 일병의 자살 사건이 보도된다. 참 웃기지도 않다. 가능성은 둘 중 하나로 좁혀진다. 국방부는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거나, 알고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 물론 어떤 경우에도 용서받을 순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부대에서 차별과 모욕과 조롱과 배제가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이에 원작 <D.P. 개의 날>의 김보통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디피는 '이제는 좋아졌다'는 망각의 유령과 싸우기 위해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 나가는 분들에게 힘을 보탤 수 있길. 오늘도 어디선가 홀로 울고 있을 누군가에게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 줄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원작 웹툰의 마지막 컷은 이렇게 끝난다. "이제 당신도 목격자야"


(2021.09.11)



학창 시절에도 군대 못지 않게 다양한 부조리를 겪었고, 대부분의 경우 나 역시 목격자이자 방관자였다. 가담하지 않는 것으로 내 몫을 다 했다고 생각하면서, 저렇게 당하는 것이 내가 아니라서 속으로 다행이라고 여겼다. 드라마 <D.P.>는 그런 비겁한 내 모습을 들춤과 동시에 내가 방관한 수많은 석봉의 얼굴을 불러일으켰다. 동급생 일진의 가방을 들던 석봉, 점심시간에 일진의 줄을 대신 서던 석봉, 틈만 나면 일진의 재미를 위해 샌드백 역할을 하던 석봉... 이 글은 알면서도 모른 척 지나쳐버린, 혹은 무심코 경멸에 가담해버린, 나로 인해 상처 입었을 수많은 석봉이들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썼다. 그들이 자기 생을 악몽처럼 여기지 않길, 진심으로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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