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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선 Feb 10. 2020

다리털

털 수북한 여자 다리, 본 적 있어요?

“내가 면도 기간으로 치면 선배거든?” 


내 다리털을 밀어주겠다며 애인이 참견을 했다. 잠깐 상상했다. 다리털을 밀어주면서도 로맨스가 가능할까? (절레절레) 나는 곧장 포기했다. 다리털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자랐다. 손가락 한 마디는 거뜬히 넘을 정도다. 애인은 맨날 내 정강이를 쓰다듬으며 “우리 털쟁이”하고 낄낄거린다. 중3 이후로 나도 이렇게 긴 내 다리털을 처음 본다. 


내가 다리털을 밀기 시작한 건 이름도 잊지 못하는 문민석이라는 놈 때문이다. 점심시간이었나 다들 서 있어서 어수선하고 시끌시끌한 때였다. 지나가던 문민석이 내 다리 쪽으로 고개를 휙 숙이더니 “어 장은선 털 많네”라고 말했다. 걔는 엄청나게 건조하고 별일 아닌 듯 말하고 지나갔는데, 내게는 별일이 되었다. 그날 당장 집에 가서 아빠 면도기로 다리털을 밀었다. (아빠 미안) 겨드랑이 털을 그때도 밀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무튼. 엄마는 털을 밀면 더 두껍게 난다고 다음부턴 그냥 두라고 했지만, 다리털 숭숭 난 여자 다리는 쪽팔린 거란 걸 알게 된 그 날 이후로 나는 다리털을 그냥 두지 못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갔을 즈음엔 털을 녹이는 제모 약이 유행했다. 브랜드와 타입별로 사들이며 새로운 방식의 제모에 도전했다. 털이 덮일 정도로 약을 넉넉히 바르고 일정 시간을 기다린 후에 같이 들어있는 납작한 주걱으로 약을 걷어내는 방식이었다. 걷어낸 약에는 녹아 끊어진 털들이 콕콕 박혀있었다. 모공 하나하나가 빨갛게 될 정도로 독한 약. 털을 녹이는 성분이니 순할 리 없었다. 며칠이 지나도 독이 오른 모공은 가라앉지 않았다.


다음은 전용 면도기였다. 칼날 주위로 비누 같은 게 달려있어 부드럽게 털을 밀어낼 수 있는... 면도 크림만큼의 부드러움은 아니었지만 부담 없이 다리털을 쓱쓱 밀어낼 수 있었다. 면도를 하고 나면 각질까지 정리되어서인지 다리가 반짝반짝했다. 매끈하고 반짝거리는 내 정강이가 좋았다. 문제는 가려움이었다. 털이 다시 자라날 때의 가려움은 참을 수 없었다. 밤이면 이불속에서 두 손으로 정강이를 부여잡고 북북 긁었다.


겨울에도 제모는 쉬지 않았다. 1~2mm 올라와 까끌까끌한 정도로 방치하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긴 바지 속에서도 언제나 내 다리는 매끈해야 했다. 애인과 모텔이라도 가는 날엔 일회용 면도기는 내 차지였다.


그러니 지금의 내 다리털에 나도 적응이 안 된다. 나는 아마도 작년 가을, 그러니까 애인과 완전히 살림을 합친 때부터 제모를 게을리하기 시작했다. 다리를 드러낼 일 없는 겨울에는 한 주에 두세 번 있는 데이트에 맞춰 제모를 하곤 했다. 그러나 애인과 함께 살게 된 후로 다리털을 감추려면 매일 제모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다. 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매일 제모를 하는 일은 피부에게도, 내게도 매우 피곤한 일이었다. 피곤해진 나는 하루, 이틀, 삼일... 점점 제모를 하지 않았고 가랑비에 옷 젖듯(?) 애인에게 털밍아웃을 하게 되었다.


처음 3~4mm쯤 올라온 내 다리털이 따갑다고 피하던 애인도 털이 점점 길어지자 수북한 내 다리털에 완벽 적응하게 되었다. 문제는 털이... 진짜 너무 자라난다는 점이다. 끝 모르고 자라는 아이들(?) 때문에 라푼젤이라도 된 기분이다. 나도 내 다리털이 이렇게 자라날 수 있음이 매일 놀랍고 신기하다. 나 조차도 처음 보는 내 긴 다리털.


어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샤워하고 속옷을 가지러 뛰어가는데 다리털이 바람에 살랑살랑 흩날리는 게 아닌가. 그 느낌이 너무 귀엽고 이상해서 빨가벗은 채로 집안을 뛰어다녔다. 애인에게 다리털이 바람에 나풀거리는 것이 너무 웃긴다고 했더니 자기는 없어 본 적이 없어서 무슨 느낌인지 모르겠다 한다. 짜식... 좋겠다. 다리털 밀어본 적 없어서.


웃긴 건 며칠 전에 친구가 말하길 남자애들도 다리털 숱을 치는 면도기를 쓴다는 거다. 아니 너무 골 때리는 일 아닌가? 아예 밀어버리는 것도 아니고 숱을 치는 면도기라니... 털이 대체 뭐라고! 누군가에게는 있어서도, 보여서도 안 되며, 누군가에게는 있되 과해서는 안 되는. 남성성의 상징이기도 하고 동시에 지저분한 무언가로 여겨지는. 인간 참 어렵게 살지. 아니, 특히 여자 사람 인생엔 어느 한 부분 녹록한 지점이 없다!


뭔가 억울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 다리털로 한 여름에 반바지를 입을 자신이 없다. 애인에게는 어찌어찌 털밍아웃 했지만, 지나가는 낯선 이에게 그가 만난 최초의 다리털 수북한 여자가 되고 싶진 않다. 그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실은 그 시선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몇 해 전 내겐 페미니스트 대모님인 정희진 선생님의 특강을 들은 적 있다. 책으로만 접했던 선생님의 강의를 처음 듣는 터라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맨 앞 줄에 자리를 잡았다. 선생님은 특유의 내달리듯 빠른 말솜씨로 강의를 이어갔다. 그 속도에 치여 잠시 아찔한 순간, 나는 그만 그의 양말과 롱치마 끝단 사이 거뭇거뭇한 다리털을 보고 말았다! 그리고 말 그대로 '깜짝 놀랐다'. 그렇게 털이 수북한 여자 다리는 난생처음이었으니까! 대모님은 역시... 달라도 많이 달랐다. 내 심장이 괜히 콩닥콩닥했다. 나는 수업이 끝나도록 선생님의 다리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날의 기억은 왠지 내게 '쪽팔린 기억'이 되었다. 다리털을 보고 그렇게나 놀라버린 나 자신이 쪽팔리기도 하고, 결국 그 놀람 때문에 내 다리털을 내놓기 어려워진 것이 쪽팔리기도 하니까... 그러나 이 쪽팔림 속에서도 아직 내 다리털은 '애인 외 비공개' 상태로 남겨두고 싶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전 본 적 없을 다리털 수북한 여자의 다리. 굳이 내가, 내 다리가 그 인생의 첫 경험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목 없는 양말만 신어도 바지 아래로 빼꼼 인사하는 이 아이들을 이제 그만 보내줘야 할 것 같다. 길고 두꺼운 내 다리털아 잘 가고 겨울에 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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