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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디 Jan 22. 2021

16. 인도 기차Ⅱ

101일간의 좌충우돌 인도 네팔 여행기

기차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는 건 어마어마하게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유리 없는 창틀 사이로 기분 좋은, 날 것의 바람이 불어왔고 창밖에는 아프리카 초원이라고 착각이 들 정도의 드넓은 연노랑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달려도 달려도 끝이 없이 펼쳐진 그 들판은 나를 무념무상하게 만들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평화로움과 안정감이 나를 감싸 안았다. 들판의 너른 품 안으로 뛰어들어 그곳을 진정 누리고 싶다는 생각에까지 사로잡혔다.



이 평화로움을 깬 것은 쓰레기였다. 인도인들은 기차 안에서 나온 쓰레기들을 한 치의 거리낌 없이 창 밖으로 내다 던져버렸다. 그들에게는 넓은 들판이 쓰레기통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어떤 이에게는 쾌감이 느껴졌고, 어떤 이에게는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랄 것 없이 쓰레기가 생기면 창밖으로 던졌다. 그들은 오히려 쓰레기를 주섬 주섬 모으는 나를 비웃는 듯했다.


그들은 버리면 안 되지만 버릴 곳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곳에 쓰레기를 버리는 게 아니었다. 우리가 아무 곳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아야 하는 것을 알고 있듯, 그들은 아무 곳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라고 알고 있을 뿐이었다. 환경 보호다 뭐다 하는 생각은 잠시, 그들의 행위에 해방감이 느껴졌다. 그들을 곁눈질하다 큰 마음을 먹고 만든 쓰레기를 창문 밖으로 던졌다. 곧바로 죄책감이 밀려왔다.



해가 저물자 노란 들판이 깜깜해졌다. 창 밖을 보는 일은 이제 흥미를 잃었고 바람을 오래 맞아 피곤함이 느껴졌다. 언제 좌석이 침대로 바뀔지 기다리고 있었다.


낮에는 사람들이 모두 1층 침대에 앉아 있는다. 한 침대에 3명이 앉을 수 있게 좌석이 배치되어 있지만 실상은 적어도 4~5명이 앉아간다. 입석표나 기차표를 예약하지 않고 무임승차한 승객들 때문이다. 비좁아도 한쪽 엉덩이 붙일 공간만 있으면 같이 앉아 간다. 이것이 인도 기차의 인지상정이다.



인도 기차가 모두 이런 건 아니다. 인도에선 좌석에 따라 기차 등급이 나뉘는데 가장 낮은 게 바로 내가 타고 있는 이 슬리퍼 칸이다. 비용이 가장 저렴해 배낭 여행자들과 서민들이 주로 이용한다. 슬리퍼 칸이 가장 더럽고 가장 사람이 많다.


여행자들이 슬리퍼 칸을 타면 꼭 영화 설국열차의 꼬리칸을 경험하는 기분이 든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기차의 등급이 올라갈수록 청결이나 제공받는 서비스에서 확연히 차이가 난다. 침대 시트, 푹신한 방석, 창문과 에어컨의 유무 등. 내가 있는 이 슬리퍼칸은 그러니까 침대 시트도 푹신한 방석도 에어컨도 없다는 뜻이다.


늘 항상 수용 인원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 칸에 탄다. 인도 기차에 사람이 미어터지는 이유다. 한쪽 엉덩이라고 붙이지 못한 사람들은 객실 복도에까지 사람들이 가득 서 있거나 앉아 있다. 그래서 화장실 한번 가는 것도 큰 마음을 먹어야 했다.


하지만 침대로 바뀌면 온전히 나의 공간이 된다. 표가 없는 사람에게 함께 앉아가는 것까진 양보를 해도 함께 누울 수는 없기 때문. 드디어 저녁 8시가 되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일어나 의자를 침대로 만들었다. 1층 의자는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서니 그대로 침대가 되었고 2층 침대는 1층 의자의 등받이를 올려 고리에 걸었더니 만들어졌다. 맨 꼭대기 아무도 앉아 있지 않던 평상은 그대로 3층 침대가 되었다. 한 칸에 위로 세 개의 침대가 생겼다.


이제 편하게 누워서 쉴 수 있겠구나 생각에 행복하다. 특별히 2층 침대를 예약한 건 현명했다. 1층 침대는 ‘네 침대가 내 침대’라는 무언의 공식으로 무임승차자들에게 점거당하기 일쑤기 때문이다. 2층이나 3층 침대를 예약하라고 여행작가들은 신신당부했다.


두 번째 층이라 안심하고 자리에 눕는데 아래층에서 힐끔힐끔 나를 보던 여자가 내 침대에 엉덩이와 허벅지를 걸쳤다. 저 정도쯤이야, 저 여자도 얼마나 힘들겠어. 안타까운 마음에 그녀를 내버려 두었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그녀의 몸이 내 침대에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그녀에겐 발로 툭툭 눈치를 주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잠을 자다 불편해 계속 깨며 뒤척였다. 일어나서 보니 이제는 내 침대에서 다리까지 쭉 피며 자는 게 아닌가. 불쌍한 내 등은 점점 새우처럼 쪼그라들어 있었다. 참다못해 내 침대를 반쯤 점령한 그녀에게 한 마디 했다.


This is my bed!


당연히 미안한 기색을 보일 줄 알았던 그녀의 대답은


No problem.

No~ problem.


그것도 넉살스러운 말투였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방귀 뀐 놈이 성내고, 물에서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고 눈을 희번덕하게 뜨며 오히려 정색을 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라고 화가 났다. 인도 여행기에서 수 없이 노 플라블럼에 대한 경고를 들었지만 웃어넘겼는데 이 상황에서 듣게 될 줄이야. 저 낯짝 두꺼운 노 프라블럼 정신.


너무나 당당한 그녀의 기세에 눌린 나는 체념하기로 했다. 이미 깜깜한 새벽이었고 녹초가 되어 실랑이를 벌일 기운도 없었다. 사람들 때문에 화장실도 못 가고, 무덥고 시끄럽고, 산소가 부족한 기차 안에서 가만히 있는 게 가장 최선이었다.


잤다 깼다를 반복하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새벽 다섯 시. 구글 지도를 확인하니 곧 내릴 역이 다가온다. 그런데 새벽 내내 못 잤던 잠이 쏟아진다. 가방을 꾸리고 정차역을 물어봐야 하는데 눈이 감겨온다.


다섯 시 삼십 분 기차가 정차했다. 화들짝 놀란 나는 침대를 함께 공유하고 있는 여자에게 물었다.


Where is here?


여자는 고락 뿌르라고 했다. 고락푸르?!! 화들짝 놀라 몸만한 배낭을 챙겨 낑낑거리며 나왔지만 열차는 다음 역으로 출발하고 있었다. 아 그냥 울까. 그럼 인도 사람들이 어떻게든 도와줄 거 같은데. 울상을 하며 고민에 빠졌다. 옆에 있는 인도인들에게 물었다.


다음 역은 어디예요?


다음 역은 땡땡 역이야.

두 시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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