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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준 Dec 28. 2020

파리 안의 런던

런던(영국)편

    확실히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그런지 프랑스에 살다 보면 다른 인접국가들에 비해 영국이 굉장히 멀어 보인다. 어쩌면 미디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브렉시트와 같은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고, 화폐 단위도 다르다. 아직 실감하진 못했지만 두 나라 간의 종교적인 차이도 크다고 배웠다. 

    여하튼 오늘날 두 나라를 구분 지을 수 있는 기준은 이렇게 무수하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관계와도 닮아 있다. 그래서인지 과거를 살펴보면 다툼도 굉장히 잦았다. 백년전쟁, 나폴레옹 전쟁 등. 본토에서 맞붙는 게 힘들 때면 가끔 다른 곳으로 무대를 옮길 때도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한 판 붙었다가 미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하기도 했다. 단, 한일관계와의 다른 점이 있다면 협력도 굉장히 빈번했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대표적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두 나라는 형제와도 같은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그게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로 인하여 문화적인 공통점도 생겨났다는 것이다.

    영영 다툴 것만 같았던 두 나라의 국민들이 본격적으로 교감을 나누기 시작하던 때는 18세기 말로 추정하고 있다. 이때,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을 사이에 두고 국가적인 다툼을 벌이고 있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혁명의 기운을 서로 주고받으며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두 나라를 사이에 두고 일어난 미국의 독립혁명까지 포함한다면 세계사에서 다루는 3대 시민혁명은 전부 이 관계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19세기가 되면 이 관계는 나폴레옹의 등장과 함께 잠시 단절된다. 그러다 영국이 나폴레옹 전쟁의 승자가 되자, 두 나라 간의 교류가 급속도로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프랑스 내에 영국 문화가 깊숙이 뿌리내리게 된다. 회화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문학과 닮은 낭만주의가 프랑스 땅에 유입되었고 이는 19세기 말 인상파의 등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건축에서는 런던의 모습을 본따만든 일명 오스만식 건축(오늘날 파리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건축양식)이 프랑스 전역에 유행한다. 뿐만 아니라 파리에서는 영국 자본이 무수히 유입되어 '파리 안의 런던'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동네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바로 이 '파리 안의 런던'이 오늘 소개할 공간이다. 서론이 길었기에 배경 설명은 이 정도로 하고 얼른 소개를 시작해야겠다.


    1. Rue de l’Elysée, 75008, Paris : 엘리제 거리 


파리 가옥의 일반적인 모습(왼쪽)과 엘리제 거리(오른쪽)의 모습, 오른쪽에서만 지하 공간이 뚫려 있다. (사진제공 : the American Library in Paris)

   19세기 프랑스에 찾아온 '영국 유행'을 두고 사람들은 'Anglomanie(앵글로마니 : 영국이 아닌 잉글랜드에서 넘어온 유행을 일컫는 말)'라 불렀다. 그리고 이 앵글로마니의 대표주자로 나폴레옹의 조카 '나폴레옹 3세'를 꼽을 수가 있다. 그는 예술가가 아니지만 프랑스 황제의 자리에 올라 파리를 런던의 모습처럼 바꾸려 한 인물이다. 때문에 그의 집무실 옆에는 가장 '런던스러운' 거리가 위치해 있다. 그의 집무실은 오늘날의 대통령궁이기도 한 엘리제 궁(Palais de l’Elysée)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궁전의 이름을 따 엘리제 거리(Rue de l’Elysée)라 불리는 길이 있다. 대통령 궁이 인접해 있기에 오늘날 일반인은 접근할 수 없는 곳이지만 이 곳의 모습은 멀리서만 봐도 파리의 일반적인 거리의 모습과는 달라 보인다. 다른 집들에 비해 건물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서 있기 때문이다. 아마 파리를 다녀온 이들이라면 인도에 밀착한 상태로 일직선 상에 나란히 서있는 집들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거리는 다르다. 일단 건물이 후방으로 물러서 있고, 물러서면서 생겨난 공간에는 지하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지하층에도 햇빛을 들여보내기 위해서다. 이는 영국식 주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로서 프랑스인들은 이 지하 공간을 두고 '영국식 마당(Cour anglaise)'이라 불렀다. 물론, 이 마당을 제외하면 '프랑스식' 건물과 다를 바가 없기에 완벽한 '영국식'이라 부를 순 없다. 하지만 최고의 권력을 누린 황제마저 런던을 동경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엔 충분한 증거라 할 수 있겠다.  

    런던에서 유학생활을 보낸 나폴레옹 3세는 가장 '런던스러운' 모습을 이렇게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 했을 만큼 영국을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최초에는 거리의 이름도 나폴레옹 3세의 어머니인 Hortense로 불렸다고 한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지금, 이 곳의 건물들은 대통령 집무실의 부속건물로 활용 중이다. 소문에 따르면 유럽의 손꼽히는 재벌로 알려진 로스차일드 가문의 일원이 이 건물 중 하나를 점유하고 있다고도 한다. 물론, 일반인은 출입이 불가능한 곳이기에 현재로선 알아낼 방법이 없을 뿐이다.


    2. Cité Trévise, 75009, Paris : 시떼 트레비즈


    오늘날의 파리는 20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그중에서 파리 9구는 19세기 파리의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동네 중 하나다. 이 구역은 혁명 이후 주도권을 잡은 부르주아들의 모임 장소였으며, 그들의 쇼핑센터라 할 수 있는 Passage가 생겨난 곳이고, 파리에서 가장 화려한 오페라 극장이 지어진 곳이기도 하다. 또한, 북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세기말부터 성행하게 될 몽마르트르의 유명한 카바레들이 보이는 곳이다. 따라서 이 곳의 주거구역은 부르주아들의 생활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파리 9구에 위치한 영국식 광장 시떼 트레비즈

    시떼 트레비즈는 바로 이 9구 한복판에 위치한 조그마한 영국식 광장을 말한다. 영국식 규칙을 완벽히 따라 만든 것은 아니지만, 19세기 초반 앵글로마니의 영향을 확인하기엔 충분한 장소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광장을 영어로 Square라 부른다. 이 Square와 프랑스의 광장을 지칭하는 Place를 비교해보면 차이는 명확하다. Square에는 기본적으로 광장 가운데 정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파리를 조금만 둘러봐도 정원이 있는 Place는 넘쳐날 것이다. 단 차이점이라면, Square의 정원은 모두가 거닐 수 있는 산책로가 아닌 사유지로서, 광장의 거주민들이 관리하는 공간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공성’이 강한 프랑스의 광장과는 면적에서부터 큰 차이를 보인다. 비록 오늘날에 이르러 Square는 프랑스식 광장을 포함할 정도로 그 의미가 넓어졌지만, 18세기부터 쓰인 최초의 Square는 조그마한 중앙 정원이 딸린 광장을 의미했다. 시떼 트레비스 중앙에 위치한 정원도 역시 초반에는 거주민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일종의 공동생활공간으로서 그 어떠한 상업시설도 들어서지 못하게 규칙이 정해져 있었으며, 그만큼 사회적 지위가 높은 부르주아들이 살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건축양식의 일관성이 없고, 비례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이 시떼 트레비즈도 완벽한 '영국식'이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을 수 있다.


    3. Square d’Orléans, 75009, Paris : 오를레앙 스퀘어


    이번엔 무려 George Sand(조르주 상드, 1804-1876)와 Frédéric Chopin(쇼팽, 1810-1849)이 살았던 곳이다. 1829년 지어진 이 광장은 영국의 한 보험회사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영국인 건축가 Edward Cresy(1792-1858)에 의해 탄생한 이 공간은 영국의 전형적인 Square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이 곳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Square라 불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영국인 건축가가 지어서가 아닌 Square의 특징을 아주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다.

    우선 이 광장에는 정원이 있다. 그리고 이 정원은 시떼 트레비즈와 마찬가지로 광장의 거주민들만이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광장을 둘러싼 저택의 외관은 매우 획일적이고 비례, 균형을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각각의 저택에는 엘리제 거리에서 볼 수 있었던 ‘영국식 마당’도 발견할 수 있다. 파리에서 이러한 ‘영국식’ 규칙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공간은 이 곳이 유일하다. 

오를레앙 스퀘어의 모습, 획일화된 디자인과 폐쇄적인 구조가 한국의 아파트 단지를 생각나게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오를레앙 스퀘어는 많은 예술가들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이 광장이 만들어진 19세기 초부터 앵글로마니가 본격적으로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국에 매료된 많은 예술가들이 어느 날부터 오를레앙 스퀘어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1831년, 작가 Alexandre Dumas(뒤마, 1802-1870)는 이 광장 3번지에 머물며 가면무도회를 열었다고 하며, 작가 조르주 상드와 작곡가 쇼팽이 각각 5번지와 9번지에서 5년(1842-1847)을 지내다 가는 등 ‘예술가의 광장’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흔적이 이곳에 남겨지게 되었다. 1977년, 이러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오를레앙 스퀘어는 프랑스 국가 문화유산에 등록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파리 한복판에서 산업화 시대 런던의 모습을 보여주는 아주 독특한 공간으로 남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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