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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준 Sep 19. 2020

캐나다의 위대한 탄생 이야기

캐나다편

(사진제공 : ville de vimy)


    바다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는 옛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캐나다 퀘벡 주가 위치해 있다. 그래서 이 곳의 공식 언어는 프랑스어. 긴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억양이나 문법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어렵지 않게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같은 언어를 공유하기 때문에 프랑스와 캐나다, 두 나라 사이에는 긴밀한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실제로 많은 프랑스인들이 캐나다 퀘벡 주에 살고 있다. 2017년 통계에 따르면,  캐나다는 프랑스인들이 6번째로 많이 찾는 나라라고 한다. 최근 15년간 그 숫자가 두배로 늘었다고 하니, 아직 현재 진행형인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언어’보다 두 나라의 사이를 더욱 돈독히 해주는 장소가 있다고 한다. 그곳은 프랑스에 있지만, 프랑스 땅이라 부를 수 없는 곳이다


    오늘날, 파리의 북쪽, 북프랑스(Haut-de-France) 주에는 비록 지금은 소도시지만 과거 상인들이 가진 권력 덕분에 거대한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상업도시들이 많이 존재한다. Artois지방의 주도인 Arras가 그 대표적인 예중 하나다. 그런데 이 도시 주변을 둘러보다 보면 또 한 가지 발견할 수 있는 것이 1차 세계대전의 흔적들이다. 바로 이 곳이 전쟁 당시 독일과 프랑스가 가장 치열하게 다퉜던 곳 중 하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중립국이었던 벨기에를 무단 침공하여 독일군이 들어온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 이후, 중립국을 침공했다는 이유로 영국이 참전하게 되자, 프랑스는 북쪽의 일부 땅을 영국에 내주어 군대가 주둔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영국군뿐만 아니라 뉴질랜드, 호주, 캐나다 등 과거의 영국 식민지였던 지역의 군대가 함께 넘어오게 된다.

    캐나다는 19세기 중반 독립된 정부가 수립되었음에도 영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00년 전후로 남아프리카에서 발생한 전쟁에서는 영국군 소속으로 참전했을 정도로 두 군대 간의 경계선은 매우 희미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캐나다는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자 재빨리 군대를 소집해서 영국군이 주둔하기로 한 북프랑스로 보내게 된다. 당시 캐나다 인구가 8백만이었는데 60만 명이 넘게 (거의) 자원하여 입대했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숫자라 평가할 수 있겠다. 그들은 전쟁이 마무리되는 1918년까지 만으로 약 4년간 프랑스에서 지낸다. 실제로 전쟁을 치른 기간은 4년 중 8-9개월 정도였고, 전시상황이 끝나면 프랑스 도시, 혹은 시골에 머물며 현지인들과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현지 프랑스인들과 결혼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고, 실제로 오늘날 프랑스 곳곳에서는 캐나다 군인 출신의 자손들을 종종 볼 수 있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의 활약은 결코 미미했던 것이 아니었다. 영국, 미국에 이어 가장 많은 외국인 전사자를 낳은 군대가 캐나다군이었다고 한다.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곳은 앞서 말한 도시 Arras 인근에 위치한 Vimy 언덕에서였다. 약 1만 명의 희생자를 낳은 이 곳에서의 전투가 끝나고, 캐나다군에게는 ‘쇼크’라는 별명이 붙여진다. 그만큼 충격적으로 잘 싸웠다는 이야긴 것 같다. 물론 이 곳에 캐나다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었고, 이 언덕을 점령함으로써 프랑스와 영국군은 승기를 잡아낼 수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독일군의 항복으로 마무리된다. 독일로선 연이은 패전에 따라 내린 결정이었고, 그 중에서 가장 큰 치명상을 입힌 Amiens전투에서의 캐나다군의 활약도 대단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캐나다 입장에선 회복될 수 없는 많은 희생을 치렀다 볼 수 있지만, 얻은 것도 있었다. 이때의 활약을 인정받아 참전한 부대는 캐나다의 공식 국군으로 임명된다. 다시 말해, 캐나다의 일부가 프랑스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때까지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영국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었던 캐나다는 이 국군 창설로 인해 자신들만의 고유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다.

    다음으로 약 6만 명에 달했던 희생자들을 추모할 차례가 찾아왔다. 전쟁을 함께한 프랑스, 영국의 도움을 받아 캐나다는 1925년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Vimy언덕에 추모비를 세우게 된다.


    추모비에는 참전했으나 실종된 11225명에 달하는 군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주변은 어느 원예전문가에게 맡겨지게 되는데, 그는 크고 작은 나무들을 심어 이곳이 마치 캐나다인 것처럼 꾸미고 싶어 했다고 한다. 실제 추모비를 포함한 91.18헥타르에 달하는 이 넓은 공간은 프랑스 정부에서 캐나다로 기증을 하게 되면서 캐나다 영토가 된 곳이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이 곳은 캐나다 정부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물론, 이 곳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장소의 상징성을 생각한다면 1차 세계대전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라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1997년부터는 캐나다 정부에 의해 역사연구센터가 개관되면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최근에는 종전 100주년을 기념하여 다양한 행사가 치러지기도 했다. 이렇게 Vimy 메모리얼은 1차 세계대전을 기억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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