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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혁진 Nov 13. 2023

범인은 나였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고 나서는 매일 오후 기다리는 소식이 있다. 바로 카카오 키즈노트에서 날라온 어린이집 선생님의 알림장. 온종일 우리 아이가 어떻게 보냈는지 자세한 소식과 함께 수십 장의 아이 사진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바쁜 업무들을 하나둘 쳐내고 나서 한숨 돌리며 보는 알림장은 매일 기다리는 꿀 같은 시간이다. 


그런데 얼마 전, 어린이집 선생님께서 의미심장한 문장을 남기셨다. 


“우리 이서~ 오늘도 이서가 너무너무 잘 놀았답니다~ 다만 놀이를 하다가 이서가 하지 않던 말을 하더라구요. 어머님과 통화하고 하원 때 할머님께 직접 말씀 드릴게요. 이서에게 ‘우리 사랑스런 이서는 너무 예뻐서 예쁜 말만 해야 해요.’ 라고 말해주니 이서 예쁜말 이라고 말하고 그 후론 하지 않았어요 ^^”


하지 않던 말이라니 어떤 말이었을까. 퇴근하고 집에 와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 말로는 이서가 어린이집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아씨’라고 했다는 거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서는 요즘 여기저기서 들은 단어들을 직접 말하곤 하는데, 그중에는 ‘아저씨’도 있다. 그런데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 보니 지나가는 아저씨를 가리키며 ‘아씨’라고 부르곤 했기 때문이다. 어린이집에서도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놀다가 ‘아씨’라고 했다기에 당연히 자동차를 운전하는 아저씨를 떠올렸겠거니 했다. 


그런데 잠시 후 거실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이서가 ‘아씨’라는 말을 내뱉었다. 흠칫 놀라 이서를 쳐다봤다. 불행히도 우리의 예상과는 다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서는 자기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자 짜증이 났는지 ‘아씨’라고 내뱉고 있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그러자 아이는 한 번 더 가벼운 짜증을 내며 ‘아씨’라고 외쳤다. 아이에게서 장난감을 떼어두고 앉혔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아이 앞에 앉았다. ‘이서야 그런 말은 하지 않아. 나쁜 말이야.’ 하지만 아이는 우리가 그 단어에 반응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는지 웃으며 계속 반복했다. 아내와 나는 아이의 눈을 바라보고 웃음기 빠진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했다. 그런 말은 나쁜 말이니 그럴 때는 ‘우와’라는 단어를 써야 한다고.


이 아이는 어디서 이 말을 배운 걸까. 어린이집에서 다른 친구에게 이런 말을 배운 걸까. 그런 거라기엔 어린이집 선생님의 글은 마치 이서만 그런 말을 쓰는 것처럼 적혀 있었다. 아이가 어디서 그런 말을 배운 걸까 곰곰이 생각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음식재료를 들춰보고 있었다. (뭘 하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도 식재료를 넣어둔 용기의 뚜껑 따위가 제대로 열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자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아씨!’


그리고 깨달았다. ‘아, 내가 범인이었구나'. 나도 모르게 답답하거나 짜증 날 때 쓰던 단어를 이서는 다 듣고 있었던 거다. 


21개월이 된 이서는 요즘 언어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어머나 세상에’, ‘피곤해’, ‘속상해’ 같은, 대체 어디서 배워온 건가 싶은 단어들을 사용하곤 한다. 한번은 칭얼대는 아이에게 나도 모르게 ‘짜증 나?’라고 묻자 ‘응 짜증 나’라고 대답했다. 순간 아차 싶어 ‘이서야, 그럴 때는 속상해라고 이야기하는 거야’라며 급하게 재교육을 했다. 


아이는 그야말로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을 체감하기 시작한 요즘이다. 시간이 갈수록 아이 앞에서 행동하나 말 한마디 하는 것에 더 신중을 기해야 함을 느낀다. 사실 몇 달 전부터는 그 이유 때문에 진행하는 도전이 하나 있는데 지금까지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목표대로라면 2~3개월 뒤에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최종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레터를 통해 소개하려 한다.


‘아씨’를 쓰던 이서에게 아내와 함께 마주 보고 앉아 몇 번을 오버해가면서 ‘우와’를 주입한 덕인지 다행히 그 뒤로는 쓰지 않고 있다. 여전히 내 말버릇을 전부 다 고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의식하지 않고 쓰던 표현들을 조금 더 조심해서 사용하려 한다. 그러려면 아이 앞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바꿔야 하겠지. 쉽지 않겠지만 조금씩 나아지리라 믿는다. 좋은 부모가 되는 게 어디 하루아침에 될 리가 있겠는가.


20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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