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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ke Crazy Dec 12. 2021

동갑내기 커플에겐 시차가 존재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예스터데이> in 여자 없는 남자들

동갑내기 커플의 비극 중 하나는 사회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시차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한 걸음 내디뎌 손을 뻗으면 잡힐 것처럼 보이지만, 시차로 인한 두 파동이 중첩을 일으키면 그 간극은 배가 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복리의 법칙처럼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간다.


<노르웨이 숲>, <해변의 카프카>, 그리고 <여자 없는 남자들>과 같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다 보면 어릴 적부터 긴 연애를 한 커플이 갑작스러운 이별을 겪고 내면이 크게 뒤틀리는 내용을 발견하곤 한다. 오늘은 그중 <여자 없는 남자들>의 <예스터데이>라는 단편 소설이 유독 떠오른다. 




주인공인 다니무라에게는 찻집에서 알바를 하다가 별난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비틀스의 <예스터데이>에 간사이 사투리로 일본어 가사를 붙여 노래를 붙이는 기타루라는 친구다. 특이한 점은 기타루는 도쿄에서 쭉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한신 타이거스 야구팀에 꽂혀 후천적으로 그 지역 사투리를 습득했고, 여름방학엔 사투리를 마스터하기 위해 간사이 지역으로 "유학"까지 다녀왔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삼수생으로 정작 대학 입시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 그에게 초등학교 때부터 사귄 여자친구가 있었다. 동갑내기지만 그녀는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대학에 들어갔다.  기타루는 얼른 대학에 들어가서 여자친구와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하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그 조급함에 정작 공부에 집중을 하지 못한다. 어느 날 기타루는 다니무라에게 자기 여자친구와 사귀어 보라는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한다. 안 그래도 본인만 뒤처진 것 같아 불안한데, 혹여나 여자친구가 다른 놈과 사귈 바에 자신이 믿을 수 있는 다니무라와 사귀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말이지만, 그의 간절한 사정 끝에 다니무라는 결국 둘이서 데이트를 하게 된다. 


그의 여자친구 이름은 에리카다. 그녀는 굉장한 미인으로 좋은 집안에서 자란 여대생 표본처럼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예정된 대로, 다니무라는 그녀와 함께 우디 앨런 영화를 보고 작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고, 대화가 무르익자 그녀는 본인의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녀는 아키(기타루의 애칭)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다재다능하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별난 행동과 고집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에게는 따로 사귀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기타루를 좋아하고 생각하면 가슴이 욱신 거릴 정도로 애틋한 감정을 갖고 있지만, 한편 그녀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겐 그것 역시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억누르려 해도 억눌러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자신의 꿈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나는 자주 똑같은 꿈을 꿔. 나와 아키가 배에 타고 있어. 기나긴 항해를 하는 커다란 배야. 우리는 단둘이 작은 선실에 있고, 밤늦은 시간이라 둥근 창 밖으로 보름달이 보여. 그런데 그 달은 투명하고 깨끗한 얼음으로 만들어졌어. 아래 절반은 바다에 잠겨 있고, '저건 달처럼 보이지만 실은 얼음으로 되어 있고, 두께는 한 이십 센티미터쯤이야.' 아키가 내게 알려줘. '그래서 아침이 와서 해가 뜨면 녹아버려.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 동안 잘 봐 두는 게 좋아.' 그런 꿈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꿨어. 무척 아름다운 꿈이야. 언제나 똑같은 달. 두께는 언제나 이십 센티미터. 아래 절반은 바다에 잠겨 있어. 나는 아키에게 몸을 기대고 있고, 달은 아름답게 빛나고, 우리 단둘이고, 부드러운 파도 소리가 들려. 하지만 잠에서 깨면 항상 몹시 슬픈 기분이 들어. 얼음 달은 이미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나와 아키 단둘이서 그런 항해를 계속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생각해. 우리는 매일 밤 둘이서 나란히, 둥근 창으로 얼음 달을 보는 거야. 달은 아침이 오면 녹아버리지만 밤에는 다시 그곳에 모습을 드러내. 하지만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 어느 날 밤, 달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지도 몰라. 달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밤을 상상하면 너무 무서워. 내일 내가 어떤 꿈을 꿀지 생각하면, 몸이 소리를 내며 오그라들 것처럼 무서워."


그로부터 이주 후, 기타루는 찻집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 그렇다기 보단, 깨끗이 자취를 감추고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아무 연락이 없었다. 그로부터 16년 후, 다니무라는 한 호텔의 와인 테이스팅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고 유능한 모습으로, 파티 주최 측 홍보대행사 담당자였다. 서로의 근황을 묻고 얘기를 나누다 자연스레 기타루의 소식을 꺼내게 되었다. 그는 미국 덴버에서 초밥 요리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때 입시공부를 그만두고 오사카에 위치한 요리학교에 들어가 간사이 요리를 공부하러 떠난 것이었다. 다니무라는 뭔가를 직감한 듯 예전에 만나던 동아리 선배와 그때 잤는지 솔직하게 묻는다. 대답은 예스였다. 그녀는 다니무라와 저녁을 먹은 후 일주일쯤 지나 그녀의 그 '호기심과 탐구심'에 따라 선배와 몇 번 관계를 가졌고, 감이 좋은 기타루는 그걸 알고 입시공부를 그만두고 어딘가로 떠나버린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다니무라는 그녀에게 요즘도 얼음 달 꿈을 꾸는지 묻는다. 그녀는 다른 일로 황급히 자리를 떠나면서 대답한다.

"이젠 그런 꿈 안 꿔. 하지만 그 꿈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해. 그곳의 정경, 그때의 느낌, 그런 게 쉽게 잊히지가 않아. 아마도 영원히 그럴 거야."




9년 간의 긴 연애에 마침표를 찍었다. 스무 살 때부터 시작한 연애는 어느덧 내 20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제 내 자아에서 그녀와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빼내고자 하니, '나'라는 사람이 마치 젠가처럼 와르르 무너질 것만 같아 건드리는 것조차 어렵다. 표면적인 이별 사유는 국제 장거리 연애로 인한 한계였다. 처음 이별 통보를 받을 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나는 뉴욕으로 유학을 왔고 뉴욕은 언제나 그녀가 선망하던 도시이기에, 당연히 그녀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어쩌면 나는) 언제나 풍족하진 못했지만, 화려한 미래를 함께 꿈꾸며 꼭 멋지게 살자며 다짐해왔다.


그녀가 불신했던 것은 화려한 뉴욕 라이프가 아니라 내 무책임한 결혼 계획과 무능함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너무 이상적이었다. 세상을 바꿔보겠다며 내 커리어와 무관한 스타트업에 무작정 들어가 일을 시작하기도 했고, 그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연구를 하겠다며 무작정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 대책 없이 유학길에 올라 허리띠를 졸라매며 타지 생활을 시작했다. 사회생활을 거의 겪어보지 못한 나는 결혼에 있어서도 낙천적이었다. 그저 서로 직장을 구하고,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반려자와 단칸방이라도 함께 살면 그걸로 충분한 결혼 생활의 시작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경제적 상황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나아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사회생활 5년 차인 그녀에게 있어서 결혼은 현실이며, 살얼음판에 발을 내딛는 것이었다. 그녀의 주변 친구들은 하나, 둘 경제력 좋은 남편들과 결혼하여 넉넉한 신혼 가정을 꾸리기 시작한 반면, 서른이 다 되어도 여전히 학생에다 낭만적인 이상을 위해 다시 기나긴 유학을 떠난 나를 보니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9년을 만나도 결국 경제력 때문에 헤어졌다는 사실에 수치심과 배신감에 분노하다가도, 아니면 그저 내 인격적인 부족함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에 자존감이 바닥을 치기도 했다. 이제는 결혼이 낭만이 아닌 현실이었다는 사실에 고개를 그저 끄덕이게 된다. 그냥 내가 철없이 어렸던 것이다.


언제나 그녀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심을 갖고 있었다. 글로벌한 인재가 되겠다며 첫 직장부터 싱가포르로 떠나기도 했고, 뉴욕에 대한 꿈에 한걸음 다가가겠다며 두 달간 무작정 여행을, 외국인 동료들과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겠다며 베트남 본사로 발령받아 떠나기도, 이제는 본인만의 사업을 하겠다며 한국에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언제나 한결같이 학교에서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나를 보니 그녀에겐 성장의 걸림돌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환경이 바뀔 때마다 그녀에겐 권태기가 찾아왔고, 나를 마치 썩어가는 팔처럼 황급히 잘라내려 했다. 어쩌면 이 이별은 그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에리카의 얼음 달 꿈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유난히 떠오르는 순간이 있다. 싱가포르에서 그녀와 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심하게 다투었던 적이 있는데, 며칠을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다. 저녁 일정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하필 운 없게도 버스를 잘못 탔고, 다시 돌아서 오는 길에서도 정류장을 잘못 내려 긴 거리를 걸어와야 했다. 평소보다 많이 늦은 시각에 집에 돌아왔다. 불은 모두 꺼져 있고 그녀는 자고 있었다. 나는 씻고 침대 옆에 허탈하게 한참을 앉아있다가 누웠다. 잠에 들려는 순간, 자지 않고 있던 그녀는 조용히 뒤에서 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너와 걷던 미아 집 골목이 떠오르고, 편의점 앞에 앉아 밤새 얘기 나눴던 것도 떠올라. 첫 데이트 때 함께 우디 앨런 영화 본 것도 떠오르고, 홍대 스타벅스에서 처음으로 카라멜 마끼아또를 마신 것도 떠올라. 늦은 밤 같이 집 오는 길에 치킨 사 온 것도 떠오르고, 첫 생일날 홈스테드 카페에서 서로에게 편지 쓴 것도 모두 떠올라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마음 한 켠이 저려왔던 건, 언젠가 내게도 얼음 달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것이란 걸 은연중 직감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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