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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호 Jan 31. 2022

아인슈타인의 싱가포르 방문과 유대인 공동체


근대 동남아시아에는 부자들이 많았다. 많았을 뿐만 아니라 그 인종 역시 다양했다. 로컬 유럽인들을 제외하면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들이 중국계와 인도계일 것이지만, 그 외에도 못지 않은 막대한 부를 쌓은 이들이 있었는데, 바로 싱가포르의 유대인들이다. 1819년 스탬포드 래플스가 싱가포르에 처음 진출했을 때 몇몇 유대인들이 함께 한 것을 시작으로 싱가포르의 유대인들의 숫자는 꾸준히 늘어나는데, 특히 1869년 수에즈 운하의 개통이 결정적이었다. 1858년 20여 가구에 불과하던 유대인들의 숫자는 1870년 172명, 1900년 462명으로 증가한다. 또한 초기 유대인들은 주로 인도나 바그다드, 주변 아라비아 지역에서 건너 온 이들(Sephardi)이었는데, 이후에 건너오는 이들 가운데에는 수에즈 운하 개통의 영향으로 독일, 폴란드, 이집트 등에서 건너 오는 이들(Ashkenasi)도 섞이게 된다. 다만 이 두 그룹은 크게 엮일 일이 없었다고 하는데, 서아시아에서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건너오는 바그다드 출신 유대인들의 경우 주로 가족단위로 건너오는 경우가 많았던 반면, 유럽에서 건너오는 경우 가족들은 유럽에 두고 부둣가에 거처를 마련하여 상업에만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유럽 출신들은 철저히 외부자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현지 사회에 녹아들려는 의지도 그리 없었다고 한다. 다만 몇몇 순간들에는 이 두 그룹 사이에도 교류가 발생하고는 했는데, 예를 들면 1922년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세계적인 과학자였던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방문과 같은 이슈가 바로 그 케이스였다.


독일 태생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로 꼽히는 그 역시 잘 알려진 것처럼 유대인이었다. 1922년 이미 유명한 학자였던 그는 그 해 말에 일본의 초청으로 강연을 가게 되는데, 일본 기선 키타노 마루를 타고 수에즈 운하를 건넌 그는 11월 2일 싱가포르에 며칠 들리게 된다. 명분은 같은 독인인 출신 유대인으로 싱가포르에서 다이아몬드 사업을 하고 있던 알프레드 몬토의 초청이었지만, 사실 아인슈타인의 목적은 바그다드 출신 정통 유대인으로 싱가포르에서 아편과 부동산업으로 거대한 부를 쌓은 므나세 메이어를 만나는 것이었다. 이 당시 아인슈타인은 유대인들에게 고등과학을 가르칠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그 일환으로 1918년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예루살렘의 헤브루 대학 건축을 위한 자금모집을 위해 싱가포르의 유대인 거부를 타겟으로 삼았다. 며칠의 방문기간 동안 그는 주로 몬토가 제공해 준 거처에 머무르면서 메이어를 만났고, 실제 만나면서 접한 메이어의 부는 아인슈타인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아인슈타인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메이어의 집은 궁전과도 같았고, 꼭대기에서는 싱가포르 전체 도시와 바다가 보였으며, 그 바로 아래에는 그가 유대인 커뮤니티를 위해 지은 거대한 Chesed-El 시나고그(synagogue 유대교 사원, 두 번째 사진)가 보란 듯이 서 있었다고 한다. 그 인상 때문인지 이 기록에서 아인슈타인은 메이어를 고대 리디아의 부자 왕 크로서스(Croesus)라고 지칭하고 있다. 메이어도 참석한 싱가포르의 유대인들이 아인슈타인을 환영하는 리셉션에서 아인슈타인은 


“과학이 보편적 우위를 통해 중요하다면,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유대인 대학이 필요한가? 과학은 국경을 넘나드는 것이지만, 그 성공은 국가들이 소유한 기구들에 의한 것입니다. 만일 그래서 우리가 문화를 증진시키고자 한다면, 우리는 서로 합쳐야 하고, 우리 자신의 힘과 수단을 가지고 기구들을 조직해야 합니다. 우리는 현재의 정치적 발전 상황(국가간 경쟁)과 특히 상당수의 우리 자식들이 다른 국가들의 대학들에서 입학을 거부당하고 있다는 사실의 관점에서 더욱 더 이 일(대학설립)을 해야 합니다.”


라며 국가가 없는 유대인들의 대학 설립을 열심히 피력했지만, 그리 긍정적인 답변은 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싱가포르를 떠나는 순간에도 아인슈타인은 마지막으로 메이어에게 자금을 보태줄 것을 요청했지만, 아인슈타인은 메이어가 어떤 결정을 했는지 끝까지 알지 못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인슈타인이 싱가포르를 떠나 일본으로 향한 바로 그 일주일 뒤,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1923년 1월 일본에서의 강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번 더 싱가포르를 들렀다가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는데, 바로 아인슈타인이 귀환길에 싱가포르를 방문한 그 주에 메이어와 싱가포르의 유대인 공동체가 상당한 양의 자금을 헤브루 대학 건립에 기부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다. 이주민 공동체 출신 세계적인 과학자의 노력이 같은 이주민 출신 상인의 숨겨진 돈을 끌어낸 것이다. 물론 노벨상 수상이 더욱 큰 역할을 했을 수도 있지만.


흔히 이산, 이주 등으로 번역되는 디아스포르의 원조가 사실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일찍부터 뿔뿔히 흩어져 전세계로 퍼졌고, 이스라엘을 성립할 때까지 영토를 가진 국가없이 초국적으로 그들끼리의 공동체성을 유지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의 예에서 보듯, 그들 사이에도 유럽 출신과 아라비아 출신 사이에 구분은 존재했고, 소 닭 보듯 한 경우도 있었던 듯 하다. 다만 몇몇 케이스에서는 서로의 이해가 합치되는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교육이다. 동남아시아의 화교화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부 출신에 따라 갈린 그룹들 사이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다가도 교육문제에서만큼은 공동 전선을 펴는 경우가 꽤 많다. 특히 20세기 초중반이 그러했다. 아인슈타인이 지적한 것처럼 20세기 초중반은 국가간, 제국간 경쟁이 극심해진 시기로 제국 혹은 국가에 의해 이중으로 억압받는 이주민들의 불안 역시 극에 달하는 시기였다. 이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똑똑하고 하나의 가치를 교육받은 후예들을 길러내는 것이었다. 다만 세계적인 대과학자가 구구절절 옳은 소리를 하며 열정적으로 설득하는데도 불구하고 대상인인 메이어의 주머니는 쉽게 열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역시나 이주민들 사이에 반목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돈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사진은 아인슈타인이 싱가포르를 방문했을 때 유대인 인사들과 찍은 사진이다. 앞 줄 아인슈타인의 바로 옆에 있는 노신사가 당시 70대 후반의 메이어고, 반대쪽 끝에 있는 이가 같은 독일 출신 유대인 몬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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