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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혁 Dec 12. 2018

행복할수가 없어

난 한번만이라도 행보카고시픈데


내가 나를 싫어할수록, 나는 구원받는다.


할만한 것. 할만한 것. 종혁이의 인생은 할 만한 것에서 또 다른 할만한 것으로의 이동 과정이었다. 보상이 뚜렷하지 않은 일에 하고싶은 마음 조금이라도 있으면 시간과 인생을 갈아 넣었다. 역사는 유구하다. 항상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일을 벌려야 한다는 강박감에 살았다. 하고 싶은 것 비스무레한 것들만 나타나도 기회라고 보았고 잃으면 안타까워했다. 그런걸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셈이 나기도 했다.


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한 것일까. 어찌보면 종혁이는 경쟁이 낳은 괴물. 먹고 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스스로의 시간과 노력을 검열하는, 남들보다 우위에 서야 하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감을 지닌 팍팍한 사회인일지도.


인정투쟁은 종혁이의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해왔다. 할만한 일을 찾지 못하면 인정받을 수 없었고,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무서웠다. 뭐, 뻔하게 시작되는 이야기다. 공부를 무지막지하게 잘해서 교육을 통한 신분 상승을 이룬 아버지가 있었다. 항상 무언가 하지 않는 것을 혐오하는 아버지는 무언가 해 보일 것을 요청했다. 결국 그렇게 해야 삶 자체가 좀 편해질 것이라고 생각한 종혁이는 공부를 하고, 일을 벌린다. 결과가 나와서야 아버지는 친절해졌다. “난 너를 인정한다” 라는 말과 함께. 웃긴건 종혁이는 자신을 인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뭔가 해보니 욕심은 항상 생겼고, 이루고 싶은게 많아지는 시점부터 노력과 성취의 상관관계는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상당히 높아진 성취 기준으로 인한 불안을 없애기 위해. 뭔가 할 일을 찾기 시작했다. 


또 웃긴건 그런 일들의 가장 중요한 지점들에서 종혁이는 잔뜩 쫄아 할 수 있는걸 못했다는 점이다. 호기롭게 시작했으나 역시 결과는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강한 행동이 필요한 때 항상 타협했다. 학교에서 독립 언론을할 때도, 난 왜 알리가 징계감이라던 학생처장 앞에서 얼버무렸을까. 지루한 싸움은 왜 싫증이 났을까. 왜 댓글 하나하나 일일히 읽어보면서 생각하길 포기하려 했을까. 취재할 때도, 더욱 앞으로 가서 부딪혔다면 더 많이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정보공개청구를 열심히 했다면, 더 괜찮은 기사를 썼을텐데.


문제는 종혁이가 이런 현상을 완벽해질 수 없는 닝겐의 고뇌쯤이라고 생각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냥 내가 못나서 못한걸로만 생각이 든다. 나를 혐오함으로서, 결국 이런 나를 싫어함으로서 내가 좋아하는 이상적인 나의 상태를 규정짓는다. 그리고 거기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며 일종의 구원을 얻는다. 난 이렇게 생겨처먹은 인간이지만 최소한 노력은 한다는거지. 자기혐오는 자기 구원의 한 방법이다. 물론 존나 비효율적이며 비웃기 딱 좋지만. 그렇게 열등감이 종혁이의 삶을 끌어왔다. 

내가 내 뚝배기를 깨야 얻는 포인트, 구원

“할 일을 찾으려는 강박감 -> 막상 하면 쫄아서 완벽히 못함 -> 그건 내 탓 -> 또 할 일을 찾음” 이라는 악순환에 대해 종혁이는 찡찡대곤 한다. 그러다가 인터넷에서 "꿈명언"따위를 쳤을때 나오는 온갖 문구들 - “그것이 너를 성공에 이르게 할 것이다.”, “무언가 하는게 짱짱이다.” 라는 반응이나 컨텐츠들을 보면 기분이 더럽다. 이러한 착취적인 노력이 성공을 위해 달려가는 알흠다운 과정으로 포장되는 것이 우려스럽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아도 자신 스스로가 만족스러운 어떤 노력도 성취의 한 개념이라고. 타인의 시선에 맞춰, 먹고 살기위해 자기계발에 빠진 사람들에게 꼭 취업을 위해서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 만이 유효한 노력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긴다. 사실 종혁이는 자신도 만족을 못 시킨다. 해왔던 것들 중 만족할만한 것은 없다. 그건 내가 능력이 없어서 그렇다. 내가 생각하는 성취의 조건은 무엇일까. 아. 나는 나를 못난 닝겐으로 평가하면서 성취란건 엄청나게 어려운 것으로 만들고 있구나. 될리가 없다. 이런 구조에서.


자, 문제는 명백하다. 나는 항상 내 못난 능력과 원대한 성취의 중간 그 어디쯤일 것이다. 노력의 착취적 구조를 바꾸고야 싶지만, 이미 일이 없으면 불안한 탓에 결국 앞으로도 이렇게 살 가능성만 높아진다. 스스로에게 좋은 말 많이 해주고 있지만, 그런식으로 번번히 내 자존감을 높이려는 시도는 찡찡대는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로써 이미 망했다. 하지만 이런 삶이 긍정할만한 요소가 있다는 것에는 순응하기 싫다(이렇게 살면 성공할거야!). 내가 힘들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이 글을 읽은 독자가 있다면 당-연히 답답할 것이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으면 어쩌라고? 귀한 시간 넋두리로 뺏어서 죄송하다. 그래서, 결론은 이거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거라고. 일단 너무 모르겠으니까. 언젠가 정말 내가 이루고 싶은 성취를 진짜 하던지, 아니면 내 기대가 낮아질지. 그럼에도 나를 넘나 사랑할 수 있게 되서 나를 잘 돌봐주는 사람이 될지. 다 너무 어렵긴 하다. 모르겠다. 진짜. 그래도 이 구조를 절대 긍정하진 않을거다. 나는 고통받고 있고 이는 너무나도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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